▣ 말씀을 귀담아듣는 예배를 드림
▣ 말하는 기도보다 듣기 위한 기도를 드림
▣ 경솔하게 서원을 하지 않음
전도서 5장 1절 ~ 7절
1.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3.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4.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5.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
6.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천사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7.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전도서는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로 시작됩니다. 솔로몬이 저자라고 추측할만한 자기소개입니다.
“전도자”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코헬렛(קֹהֶלֶת qoheleth (ko-heh'-leth)”인데, 그 뜻은 현자, 지혜자, 혹은 넓게는 설교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전도자”는 자기의 이름이 솔로몬이라고 스스로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저자가 솔로몬이 아닌 무명의 지혜자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전도자의 메시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람의 삶은 ‘헛되다’입니다. 그는 전도서 전체에서 ‘헛되다’를 마흔 번 넘게 사용하여 삶의 모든 업적이 헛되다고 지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도자가 완전한 비관론자는 또한 아닙니다. 그는 여섯 번에 걸쳐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 또한 알았다’며 믿음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헛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전도자는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그는 사람이 “해 아래”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해 위의 삶”을 찾아야 함을 말합니다. 당시 히브리인들의 사상은 “해 위”와 “해 아래”를 구분했습니다. “해 위”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세계요, “해 아래”는 한계가 분명한 상대적이고 제한적인 세계, 곧 우리 인간의 세계입니다. 결론적으로 전도자는 해 아래의 삶을 사는 인생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절대적 본분임을 말합니다. 이러한 진리가 없다면 전도자 말대로 우리의 삶은 헛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두려움 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며 사는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 인생을 조명해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헛될 수밖에 없는 해 아래 인생을 극복하고 인생의 참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우려 한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참되고 의미 있게 살기 위해 어떻게 하나님 경외하며 살아갈지를 전도자의 말씀 가운데서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말씀을 귀담아듣는 예배를 드림
전도자는 5장 1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예배에 대해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 네 발을 삼갈지어다”, 즉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갈 때에는 올바른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너무 당연한 가르침인데, 한편으로는 무너진 모습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는 우리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온갖 술수로 자기의 유익만을 챙기는 삶을 살면서도 거리낌 없이 예배 자리로 나가는 사람들, 이웃에게 원망과 탄식을 듣는 짓을 하면서도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으며 예배에 나오는 사람들, 서로 미워하고 갈등하면서도 화해하지 않으며 서로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의 예배, 자기 입맛에 맞는 성공주의 설교를 찾아다니며 이 교회 저 교회를 기웃거리는 예배, 이런 모습을 어찌 참된 예배라고 할 수 있을런지요?
“가까이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예배의 중심은 “말씀을 주의 깊게 듣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많은 헌금을 드리는 것보다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자기 행실을 돌아보는 것이 예배입니다. 악을 행하고도 깨닫는 것 없이 지나가는 예배는 모든 것이 헛될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을 변화시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말씀합니다. 쌍날을 가진 예리한 칼보다도 더 예리한 말씀을 예배 가운데 들어야 합니다. 그 예리한 말씀에는 우리의 영, 혼, 육을 찔러 쪼개서 모든 더러움을 제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과 부요를 차지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영, 혼, 육을 깨끗하게 하는 말씀을 듣는 예배여야 합니다.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 말씀에서 자신이 벗어난 부분들을 교정 받고 새롭게 재창조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일주일 동안 세상에 살면서 죄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일주일 동안 세상 가운데서 죄와 함께 살았음을 인정하지 않는 성도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들을 때, 자기의 허물된 모습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이 길가에 뿌려지면 듣고도 금방 잊어버리게 된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단단한 길 가 같은 마음이 되면 영혼이 새롭게 되는 은총을 입지 못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사람은 말씀을 뿌리는 것을 구경하러 예배에 나온 사람이지 참 예배자는 아닙니다. 하나님 경외함이 없는 사람이 예배에 참석하면 이와 같은 모습일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 말씀 앞에서는 경청, 귀담아들음이 중요합니다. 성도는 나의 논리로, 나의 지식으로, 나의 경험으로 말씀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나의 논리, 나의 지식, 나의 경험을 수정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에서 말씀을 귀담아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에 의지하여 주의하여 듣고, 적용하고, 교정받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귀담아 듣는 예배의 모습은 신앙의 연조가 얼마나 되느냐와 상관이 없습니다. 말씀을 듣는 자의 마음 밭이 어떤 상태인가에 더 상관이 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잘못을 꾸짖어 주시는 사랑 넘치는 부모님 음성인 줄로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잘못을 꾸짖어 주시는 부모님의 사랑을 추억해보십시오, 육체를 낳아주신 부모님의 사랑은 부모님이 소천하시면서 끊어지지만, 영원히 살아계신 부모님이신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평생에 우리가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할 때마다 계속해서 꾸짖어 주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귀담아 듣고, 자기의 불의함을 교정 받으며, 거룩한 의의 옷으로 갈아입혀 주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말하는 기도보다 듣기 위한 기도를 드림
이제 2절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기도 유형에 대한 가르침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말한다는 것은 즉, 기도를 뜻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땅에 있는 사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위치를 잘 지키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은 난 몰라요,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고백할 수밖에 없는 제한적이고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자기 말만 늘어놓고 그분의 생각과 계획은 들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도>란, ‘신께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구하는 언어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일방적으로 구하기만 하다가 기도를 끝맺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는 어떤가요? 여러분의 기도 내용을 들여다보니 ‘이것도 주세요, 저것도 주세요, 주시옵소서’ 뿐인가요? “주님, 말씀하시옵소서. 제가 듣겠나이다”라는 사무엘과 같은 기도는 얼마만큼 드리고 계신지요? 사무엘이 이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을 기다렸을 때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이 듣기 위한 기도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 역시 성도 여러분에게 말하는 기도보다 듣는 기도를 더 중요하다는 말씀을 전해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각을 말씀하시려고 우리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하실 기회를 드릴 그때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바로 “응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드릴 때 성령님께서 우리 기도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기도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잠잠히 그대로 앉아 계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려고 여러분의 생각을 깨끗하게 지우도록 성령으로 역사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요? 내 마음이 여전히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원하는가를 헤아려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런 마음인데 아무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때가 바로 성령께서 우리 생각을 점령하신 때입니다. 그때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들을 타이밍입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제게 말씀하시옵소서.’하며 잠잠히 기다리면 됩니다. 그러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의 성경 말씀이 분명하게 생각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인해 “아~! 주님이 말씀을 주시는군요! 하는 확신의 감동도 넣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런 응답을 이미 체험하신 분이 많으실 것으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기다리는 그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응답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 있는데 뚝 자르고 자기의 말을 하는 비인격적인 하나님이 결코 아니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릴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각을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시편 62편에 드리는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렸더니 하나님께서 한두 번 내게 말씀하신 것을 내가 들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드리러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많은 말을 하려 애쓰지 않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슨 말을 할까를 궁리하지 말고 잠잠히 앉아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기를 권면합니다. 전도자도 하나님 앞에서 말을 적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많은 말을 하면 어떤 부작용이 생긴다고 전도자는 말했습니까? 우리가 걱정을 많이 하면 개꿈을 많이 꾸게 되는 것을 체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경우에 합당한지 아닌지도 가리지 않고 마구 말을 하다가 어리석음만 더 나타낸 적도 있습니다. ‘빈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처럼 정신만 사납게 하는 언어공해를 품어내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말하는 기도보다 듣는 기도로 하나님과 더 많은 대화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3. 경솔하게 서원을 하지 않음
“언약”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약속하신 것이요, “서원”은 사람이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사람과 풍성한 은혜로 언약을 맺으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언약대로 반드시 실천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서원을 강요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대부분 조건을 걸어서 잘못된 서원을 드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만약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주신다면 저도 하나님께 이렇게 하겠습니다.”하는 식입니다. 우리는 이런 잘못된 서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께 드린 서원에도 신실하십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서원을 했거든 빨리 갚아라, 함부로 서원하지 말라, 실수였다고 핑계하지 말라, 그러다가 멸망당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허황된 꿈으로 꾸며대는 말을 많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사람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헛된 말을 많이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헛된 서원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서원은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드리겠다는 사람의 약속입니다. 그 헌신의 약속이 좋은 것이요,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경솔하게, 또는 함부로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지만, 사람에게는 신실함이 없기에 약속을 잘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약속을 드리고 난 후, 그것을 어기게 되면 하나님을 속이는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속인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겠는지요? 우리는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서 경솔한 헌신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 부부가 속인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땅 값의 얼마를 남겨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볼 때에 그들은 하나님께 전부를 드리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그 약속을 어겼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헌신하기도 전에 땅을 팔아서 전액을 드리겠다고 약속하고는 자기들을 위해 먼저 남겨둔 후에 드렸던 것이 그들에게 재앙이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기들의 생각을 더 우선순위에 둔 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본문 6절의 말씀대로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천사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는 말씀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 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영광과 만족을 위한 헌신,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서원은 오히려 그 사람에게 족쇄가 됩니다. 자기를 위하는 그 사람은 서원을 지키지 못한 채 불순종과 거짓말쟁이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의 헛된 서원은 더 나아가서 불순종과 거짓말에 대한 보응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꿈을 적게 꾸고, 헌신하겠다는 말조차 적게 하는 것이 오히려 지혜롭습니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헌신하는 자로 섬기는 것이 도리어 성도의 바른 서원의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그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거룩한 삶을 통해서 증거 되기 때문입니다.
전도자는 해 아래에 사는 인생이 허무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말씀합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어야 허무를 극복하고 사람의 본분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예배자입니까? 내 소원을 쏟아내는 대신에 하나님의 생각을 응답으로 받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자기만족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하나님께 서원된 헌신자로서 섬기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모두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임을 알고, 모든 사람의 행위와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순종하면서 성령과 동행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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