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과 존중으로 맺어진 빌레몬과의 관계
▣ 관용과 인정으로 맺어진 오네시모와의 관계
▣ 중재자로서 바울의 선한 영향력
빌레몬서 1장 1절 ~ 10절
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2.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4.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5.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6.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7.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빌레몬서는 바울이 로마에서 1차 구금되었던 시기에 빌레몬이라는 개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빌레몬서에는 3명의 중요 인물이 등장하는데, 사도바울, 빌레몬, 오네시모입니다. 사도바울은 1차 선교여행 때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 빌레몬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레몬은 에베소에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후 자기 집에서 모임을 시작한 골로새 사람이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는데, 주인의 재산을 훔쳐서 도망친 노예였습니다. 이 세 사람의 관계를 통하여 서로에게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배우는 시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 사랑과 존중으로 맺어진 빌레몬과의 관계
성경은 사람이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게 보이셔서 하와를 창조하시고 가정을 이루도록 해주신 것을 통해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창 2:18~25)부부 둘이서 사랑의 관계를 맺고 서로 교통하며 도우며 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가정에서 부부의 대화와 협조가 마르면 부부의 관계가 끊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오늘날 남편은 돈 버는 일, 아내는 자녀들을 돌보며 돈 쓰는 일을 각자 알아서 하는 일 중심의 가정들이 많습니다. 돈 버느라고 너무 피곤해서, 가정 일에 지쳐서 대화할 시간이 없다고들 합니다. 가족 간에 서로 대화 많이 하고, 서로 눈빛도 많이 교환하는 가족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빌레몬은 골로새에 사는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에베소에 사업차 방문했다가 바울을 만나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골로새로 돌아온 그는 자기의 집을 예배 처소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빌레몬의 온 가족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거침없이 자기의 제자에게 “동역자”라는 호칭으로 불렀습니다. 초대교회는 구원받은 사람이 자기의 가정을 모임 장소로 제공하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울 사도와 디모데는 자기 가정을 교회로 제공한 빌레몬을 사랑하는 동역자로 불렀습니다. 또 자매 압비야는 빌레몬의 아내로서 남편과 함께 기쁨과 사랑으로 성도들을 섬겼습니다. 또 “우리와 함께 병사된 아킵보”는 골로새 교회의 교역자로써 빌레몬의 아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빌레몬은 온 가족이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바른 신앙의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빌레몬이기에 사도 바울은 “동역자”라는 호칭으로 다정하게 부른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기에게 배우고 자랐던 제자였지만, 지금은 자기와 같은 지도자가 되었음을 인정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형제”라고 그를 부릅니다. 그가 성도들을 사랑하며 섬김으로써 평안하게 예배를 드린다는 소식을 듣고 감옥에 있는 바울이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기쁨은 항상 제자들이 바르게 서 가고 하나님 나라에 유익되는 지도자로 세워지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주의 종들의 기쁨은 오직 성도들의 아름다운 성장입니다. 또 주의 종의 슬픔과 아픔은 성도들의 실족과 자라지 않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에 자기를 드러 내는 학벌, 문벌, 경력 같은 것들은 배설물 같이 버렸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영혼이 주 안에서 아름답게 성장하는 일에는 모든 생각과 열정을 집중하여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 사도이기에 주 안에서 잘 성장하여 골로새 교회를 세우도록 돕는 빌레몬이 너무 존귀하고, 사랑스럽고, 기뻤던 것입니다. 우리도 빌레몬과 같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신실한 성도들로 자라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하게 축복합니다. 이것이 간절한 소원 중에 가장 큰 소원이요, 하나님의 큰 기쁨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2. 관용과 인정으로 맺어진 오네시모와의 관계
또 한사람의 이름을 사도 바울이 거론합니다. 그는 부유한 빌레몬의 집에서 종살이를 했던 오네시모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인인 빌레몬의 재산을 훔쳐 도망을 나왔습니다. 오네시모는 도망친 종들에게 어떤 형벌이 내리지를 알고 있었기에 멀리멀리 도망을 쳤을 것입니다. 결국 로마까지 도망을 온 오네시모는 구금 중에 있는 바울을 만나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 전도의 계획에 따라 사도 바울은 갇힌 중에서도 자유롭게 면회를 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기 때문에 로마에서도 복음전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의 전도로 회심을 한 것입니다. 세상에 살 때에 죄인 줄 알지 못했던 것까지 슬라이드 넘어가듯이 죄로 깨달아지는 체험을 말합니다. 이것이 회심(convincement, change of heart)입니다. 회심(回心)은 자기의 죄 된 모습을 들여다보고 경악을 하며 죄를 고백하고, 죄인의 삶에서 떠나 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겠노라고 주 앞에서 다짐을 하는 체험을 말합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고백한 오네시모를 사도 바울은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당시의 로마 사회법으로 노예가 도망을 쳤다, 그것도 주인의 재산을 훔쳐 도망을 쳤다면 당연히 사형입니다. 십자가에 못 밖아 다른 노예들에게 일벌백계로 삼는 십자가형을 당해야 했습니다. 아니면 주인이 자기 임의대로 죽여도 아무도 잘못됐다고 말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아니면 도망자라는 라틴어의 첫 글자 “F"를 이마에 낙인으로 찍어 다시는 도망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런 처지에 몰린 오네시모를 위해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먼저, 오네시모에 대한 말을 하기 전에 빌레몬이 스승인 바울 자신에게 얼마나 기쁨과 신뢰를 주는 제자인지를 말합니다.
빌레몬의 신앙 모습은 모든 교회의 모범이 될 정도요,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선을 행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뢰와 칭찬입니다. 이렇게 신실한 주인의 재산을 훔쳐 달아난 오네시모는 충동적이고 인품이 나쁜 노예였을 것입니다. 그런 노예는 당시의 주인의 권한으로 손과 발을 자르는 처벌을 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빌레몬은 주인의 권한을 행실이 나쁜 종 오네시모에게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신실한 빌레몬은 불순종하는 오네시모 때문에 많은 속을 썩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트러블 메이커 오네시모가 어느 날 몰래 자신의 재산을 훔쳐서 도망을 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오네시모라는 종에 대한 기억이 빌레몬의 기억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도 바울이 간절한 편지를 손에 들려서 오네시모를 보내왔습니다. 오네시모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보증과 바울에게 꼭 필요한 일군으로 사용되도록 그의 죄를 용서한 후에 다시 돌려보내 달라는 당부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빌레몬의 스승으로서 “내가 자네 대신 나를 시중들어 줄 사람으로 오네시모를 사용할 테니 그리 알면 고맙겠네”라고 할 수도 있는 사이이지만, 빌레몬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빌레몬이 용서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려고 한 바울입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내서, 용서를 받고 돌아오면 다시 심복으로 곁에 두고 섬김을 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신실한 제자를 존중하고 인정해 주는 사도의 겸손함과 온유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한편 오네시모가 회심하여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 유익한 일꾼이 되었었음을 인정해 주는 바울입니다. 또한 회심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용서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오네시모에게 가르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면, 반드시 자기가 지은 죄를 다 회개하게 하시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죄를 깨닫고, 지금까지 지었던 죄로부터 완전히 떠나기로 결단하는 것과, 죄를 지은 사람에게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고 다시 또 그런 악을 행한다면 배상을 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회심한 오네시모가 이렇게 온전한 회개를 할 기회를 준 사도바울입니다.
뿐만 아니라 회심한 오네시모를 극진하게 영접하고, 귀하게 대접해 줄 것을 간곡하게 당부합니다. 그를 바울사도를 영접하는 것 같이 영접하고 형제로 대해 달라는 간절한 당부의 글, 능히 사도의 부탁을 들어주고도 남을 빌레몬의 넓은 마음임을 인정하면서 보낸다는 첨언. 그가 빌레몬에게 저질렀던 모든 죄를 다 용서함으로써 스승인 사도를 기쁘게 해 달라는 당부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의 죄를 용서함과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주기도문에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뜻을 함께 이루어드리자는 스승의 권면입니다. 이런 용서가 바로 그리스도인이 선한 영향력으로 세상에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는 모습입니다. 얼마나 못된 종이었으면 “무익한 자”라는 뜻의 “오네시모”라는 이름을 얻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오네시모가 변화되었음을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빌레몬에게도 오네시모의 거듭남을 인정해 주자고 권면했습니다. 만약에 이전의 오네시모가 입힌 손해를 갚아야 용서하겠다면 대신 갚아 줄 테니 용서하자고 합니다. 남의 수치와 재정적 빚조차 자기의 것으로 대신 감당하는 관용과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선한 영향력임을 바울 사도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중재자로서 바울의 선한 영향력
우리는 노 사도가 된 바울에게서 젊은 시절의 바울과는 많이 변화된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는 왕성한 다혈질로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는 무엇을 하든지 최고로 열심을 내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배워도 당시의 최고 석학인 가말리엘에게서 배웠습니다. 유대 최고 공회원이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율법에 흠이 없는 유대교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나사렛에서 태어난 예수라는 가난한 목수,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믿는 다수의 무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다 잡아 가두고 없앰으로써 유대교의 순수성을 보존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가장 칭찬 받고 인정받는 그리스도인인 스테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일 때에 그 자리에 집행관으로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당을 다 잡아들이려는 공문을 들고 다메섹으로 향하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고 회심을 했습니다. 회심 후에 예수를 믿고 전하는 일에도 그는 최고로 열심을 내었습니다. 안디옥에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 유대인의 율법에 어긋난다는 책망을 받을까 봐 슬그머니 일어나 피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베드로를 신랄하게 공개적으로 비판했다고 바울 스스로 말을 했습니다.(갈2:11-14)
당시 초대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베드로가 그런 짓을 했으니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누군가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 반드시 지적을 해주고 책망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품이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았어도 여전히 육체적 열심이 바울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좀 더 세월이 지난 후에, 바나바와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마가 요한이라는 청년을 데리고 갔습니다. 성숙되지 못하고 훈련되지 못한 청년 마가는 선교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고 혼자 복귀를 했습니다. 성공적으로 선교를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2차 선교 여행을 떠나려던 바나바와 바울의 의견이 달랐습니다. 바나바는 비록 첫 번째 선교여행에서 실수하고 실패했지만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서 훈련을 시키고 일군으로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의견이 달랐습니다. 한 번 속을 썩인 사람은 반복해서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전체 선교를 망치게 하기 때문에 결코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이 크게 다투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로 떠났습니다.(행 15장)관계 중심의 바나바와 일 중심의 바울이 부딪친 것입니다. 그 일 이후로 바나바는 성경에 그 이름과 사역이 더 이상 언급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더 많은 일을 했고 더 많은 사역이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업적으로는 바울이 옳은 것 같습니다. 남은 평생 열심히 사역하는 동안 바울사도도 나이가 들었습니다. 나이가 드는 동안 여러 환란을 겪기도 하고, 갇힌 몸이 되어도 전도인의 삶을 살면서 바울 사도에게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일 중심일 때는 다시는 함께하지 않겠다고 쫓아버린 마가를 가까이에 두고 사랑하며 동역자로 인정하는 관계 중심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몬 1:24에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
바로 여기의 바울이 말한 동역자 마가가 1차 선교여행 때 도망갔던 청년 마가입니다. 딤후 4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의 유언과 같은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도 이 마가가 등장을 합니다. 바울의 사역에 무익하고, 해가 되어서 쫓아 보냈던 마가에게 바나바는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손을 잡아 주어 잘 훈련시키고 훌륭한 동역자로 세웠습니다. 이 마가는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 기록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중에도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가 할 때에 제일 잘한다고 생각이 되어 누군가 도와주는 것을 은근히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 그 사람 손길이 닿기만 해도 뭔가 달라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덜 멋있고, 조금 덜 훌륭해도 함께 일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한 분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일하시고 계심을 우리에게 계시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Only One God! 이시지만 독불장군으로 자기주장과 고집대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이 연합하시는 것을 계시해 주십니다. 더군다나 우리 같이 어눌하고 미련한 자들까지도 동역자로 관계를 맺으며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 노사도 바울도 변화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전에 큰 실수를 했었던 노예였지만 지금은 새사람으로 거듭난 오네시모를 관용으로 받아들여 유익한 하나님의 일군으로 함께 세우자는 제안을 빌레몬에게 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에게는 어땠을까요? 해를 끼치고 도망친 무익한 노예 오네시모가 주인집으로 찾아가는 일이 쉬운 일이었을까요? 손발에 못 박혀 골로새 저자거리에서 십자가형을 받아도 누구 한 사람 빌레몬을 탓하지 않을 것입니다. 손발을 절단하고 평생 불구로 종살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마에 “F" 자를 불로 지지게 될 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말을 자기 입으로 직접 해야 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아담과 하와 이후로 “잘 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는 말을 하지 않으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잘못했으면 피하여 숨으려는 것이 우리 죄 된 본성들이 가장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선생님이 주인을 찾아가서 “잘못했다, 용서해 달라”는 말을 하고 와서 다시 자신을 섬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이 바울의 원하는 대로 잘 되었을까요?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랬을 것입니다. 빌레몬은 도망친 무익한 노예 오네시모를 용서했을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자기가 큰 해를 끼치고 괴롭게 했던 빌레몬에게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용서를 구했을 것입니다. 빌레몬은 사도바울의 기대대로 그를 용서하고 자유의 몸이 되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이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사랑의 관계를 맺어가는 그리스도인의 성숙입니다. 성경 밖의 기독교 전설이 전하는 내용으로는 용서를 받은 오네시모는 다시 로마의 바울에게로 돌아가 로마의 노예들을 기독교 신자로 개종시켰고 95년 도미티아누스의 박해로 처형당했다고 합니다. 오네시모와 빌레몬 사이에 중재자로 선 사도바울은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사랑과 용서의 관계를 회복시켰습니다. 바울을 사이에 두고 영원히 껄끄러울 뻔했던 두 사람을 사랑하는 형제 사이로 변화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서로 돕는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요13:34)는 주님의 당부는 사회적 관계성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의 삶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과 자기 사랑을 위한 이기적 이해관계는 아픔과 슬픔과 단절의 열매를 맺지만,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이타적 관계는 화해와 용서와 관용의 선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우리가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중재자가 되어 하나님과,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맺게 하신 것 같이 이웃들과 사랑의 선한 관계를 맺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과 오네시모와 함께 맺은 관계와 같이 성도와 성도 사이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랑의 관계 많이 맺으시는 우리 교회 되기를 축복합니다. 직장에서 상사와 동료와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선한 전문인 선교사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빠와 아내와 자녀 사이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가정을 이루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의 종과 성도들과 예수님이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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