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데스다에 모여 있는 사람들
▣ 서른여덟 해 된 병자
▣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체험할 수 있는 은총과 자비
요한복음 5장 2절 ~ 9절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지난 일주일 동안에도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함께 계셨던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고 또 찾으면 주님과 많이 만날 수 있지만, 세상을 향해 많이 두리번거린다면 주님을 만나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됩니다. 지난주에도 주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가지 못하는 어디선가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셨을 것입니다. 그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의 소원들 들어주셨을 주님이 우리 소원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도 주님 찾아오시고,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곁에 있는 가족을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많이 찾고, 주님을 많이 만나고, 주님께 은혜도 많이 받으세요.”
1. 베데스다에 모여 있는 사람들
오늘 본문에서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몸과 마음이 지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고 합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북동쪽에 있는 “양문(Sheep Gate)” 가까이에 있었는데, 이 문은 희생 제물로 바쳐질 양들이 성전으로 들어가는 통로였습니다. 가끔 그 연못에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이는데, 그때 가장 먼저 뛰어 들어간 사람은 무슨 병이든 낫는다는 소문 때문에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항상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그 환자들 중에 특별히 세 부류의 병자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중풍병자)입니다. 이 세 부류의 병자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연못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입니다. 맹인은 천사가 와도 볼 수 없기에 남들이 먼저 물에 들어가는 ‘첨벙’ 소리만 들을 뿐입니다. 다리 저는 사람 역시 두 다리가 멀쩡한 사람을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혈기 마른 중풍병자는 뛰는 건 고사하고 자기 힘으로 움직일 수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천사가 와서 연못물을 움직이게 할지라도 치료받을 기회를 얻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천사가 물을 움직이는 때가 자신의 전적무능을 체험하는 기회가 될 뿐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한 모습, 이 모습은 이 세상 모든 인간이 처하는 실제적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기 죄를 지고 영원한 죽음에 처해야 할 인간의 절대절망을 이 세 부류의 환자들에게서 보게 됩니다.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전적은혜의 필요성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인간 모습입니다. 이렇듯 자신의 능력으로는 구원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얽어맨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참 은혜요 기독교 구원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구원을 얻을 방법이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구원에 관해 모두 맹인이며 다리 저는 사람이요 중풍병자들입니다.
기독교의 은혜란,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해서 얻어내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대가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가 고침을 받고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그것이 은혜입니다. 베데스다의 뜻이 “은혜의 집”, “자비의 집”입니다. 수많은 병자들은 “베데스다”라는 이 이름에 소망을 걸고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천사를 보내셔서 자기의 병을 고쳐주실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믿고 베데스다 연못으로 나아왔습니다. 집에서도 성전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기에 베데스다로 모였습니다. 자기 힘과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기에 이곳으로 모였습니다.
오랜 병마와 싸우는 동안 외롭고 지친 몸과 마음을 치료해 주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입기 원한 사람들입니다. 가족도 종교지도자도 외면한 사람들을 하나님은 은총의 집 베데스다에서 만나 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이런 은혜를 체험하는 베데스다이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2. 서른여덟 해 된 병자
본문의 38년 된 병자를 보십시오. 삼십팔 년 동안 중풍 병으로 누워 있는 사람의 심정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그도 빨리 나아서 건강을 회복하고 행복하게 살겠다는 소망을 품었을 것입니다. 가족들의 위로와 돌봄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38년 동안 자리에 누워 있는 그에게 지금은 누구도 관심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의 외로움만 그에게 쌓여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를 점점 더 절망하게 하고, 장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게 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그는 연못가를 떠나는 행운아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만 봤을 것입니다. 움직일 수 없는 자기의 몸뚱이를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면서 치료의 소망도 점점 더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베데스다 치료의 연못을 떠날 수도 없는 모습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에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화려한 스펙과 성공한 사람과 활력이 넘치는 곳으로 쏠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외면당하고, 소망을 잃어버린 낮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로 향합니다. 그들에게 장래와 희망을 주시려고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찾아가십니다. 그래서 중풍병자에게 다가가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처음 병에 걸렸을 때에 가졌던 그의 희망, 병 낫기를 간절히 소원했던 첫 희망을 기억나게 하려는 것이지요. 하나 그의 대답은 그동안 자기가 희망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되 뇌일 뿐입니다.
도와줄 사람이 없으므로 자기는 절대로 나을 수도 없다고 절망합니다. 그는 병을 고치는 게 자기의 소원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고쳐줄 천사가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린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자기를 돕는 손길조차 없음에 거듭 느꼈던 절망감을 토로했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절망에 빠진 외로운 그를 보시고 다가오셔서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고 잊힌 사람에게 자비와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구원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장래의 후손들에게도 그렇게 입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자비입니다. 베데스다의 뜻이 “은총의 집”, “자비의 집”인 이유기도 합니다. ‘나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도움이 필요한데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고 정직하게 고백하는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이 은총이요, 자비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38년 된 병자와 같은 고백이 필요합니다. 나의 절대무능을 도와주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내게 너무 절실하다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무능함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사람을 무시하고 외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직하고 진실한 우리의 고백을 기뻐하시고 사랑스럽게 들으시고 은총을 베푸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일생에 정직하고도 진실한 이 고백이 하나님께 항상 올려 지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3.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체험할 수 있는 은총과 자비
영적인 이치를 따라서 분별해 본다면, 믿는 우리는 이미 베데스다에 모여 있는 사람들로 볼 수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나면, 우리는 기도의 자리로, 말씀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교회 공동체와 기도 공동체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합니다. 오직 주님께 함께 아뢰며 함께 기도할 때에 문제가 해결되고 마음에 위로가 평강이 임하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믿음의 행위들이 베데스다, 즉, 우리에게 은혜와 자비의 집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 줄 곳을 알지 못해 이리저리 헤매고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저기에 가면 치료가 될까, 여기에 가면 문제가 해결될까 스스로 찾아다녀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질병과 사고는 동일하게 고통스럽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복이 있는 것은 베데스다로 나아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기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고통의 짐을 져 줄 이웃들이 있어 위로가 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우리의 짐을 대신 져주시기에 복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질병을 치료해 주셔도 감사하고, 치료받지 못한 채 죽어도 감사한 것은 주님 품에 안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중풍병자를 고치신 날은 ‘안식일’이었다고 요한은 기록했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쉬셨음을 기억하라고 정하신 날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다가올 천국에서의 영원한 안식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을 기억하는 안식일보다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에 치중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안식일에 사람들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것을 금하고 정죄했습니다. 일주일 안에는 안식일을 제와한 나머지 여섯 날도 있으니 그날 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안식일에 자비와 은총을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게 하시려고 안식일에 계속 사람들을 치료하셨던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서도 이 차이를 민감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종교지도자들도 자기들이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며 순종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생각대로 순종하려는 일이 없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천사가 가끔씩 내려와 물을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물속으로 들어가는 병자는 어떤 병이든지 고침을 받는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병자들이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 있었습니다. 마비된 몸 때문에 먼저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38년 중풍병자도 거기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만이 절대절망에 처한 자기 병을 고칠 수 있는 장소라는 믿음으로 거기에 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소망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병자들이 연못 속으로 먼저 들어가는 것을 바라만 볼뿐이었습니다.그에게 예수님이 다가가셔서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낙심하고 절망하여 이제는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자기 삶에 지극히 만족하고 무엇이든지 잘 나가는 신바람 인생에게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평생 주변인으로 살던 갈릴리 제자들을 찾아오셨고, 하나뿐인 아들의 관을 붙잡고 우는 과부에게 찾아오셨고, 38년 동안 깔고 누웠던 자리를 의지하며 살아온 중풍병자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의 인생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켰습니다.
38년 동안 깔고 있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주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한 중풍병자는 즉시로 걸을 수 있었습니다. 자기의 경험과 지식의 자기중심적 삶의 자리를 들어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제 그 사람은 안식일이 사람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임을 확실히 아는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크고 놀라운 기적의 은총과 자비를 베푸신 베데스다의 하나님을 전해야 합니다. 훗날 영원한 안식이 기다리고 있는 천국에서의 안식을 얻는 것이 지금 자리를 들고 걸어 다니는 기적을 체험한 것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가 나아갈 베데스다가 우리 앞에 있는 우리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큰 문제를 만났을 때 우리가 갈 곳은 은혜와 자비의 집인 베데스다입니다. 그곳에서는 우리의 고통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찾아오시는 주님이 하시는 말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를 듣게 되면, 그 말씀을 그대로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고 순종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내 경험과 지식의 보청기를 끼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당황스럽고,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이 하면 됩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일을 행하여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베데스다 연못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은혜와 자비의 베데스다 연못을 많이 체험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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