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립된 자를 찾아가시는 하나님
▣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심
예레미야 33장 1절 ~ 3절
1.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되 점점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시는 것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갓난아기가 자라서 아이가 되고, 청소년이 되고, 신사숙녀가 되는 것이 부모에게는 큰 기쁨과 보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중생한 영혼이 날로 성장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말씀을 묵상하면서 말씀과 나의 삶을 비교해 봐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면 잘 성장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내가 발견된다면,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매일의 삶이 계속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성장하는 삶이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레미야는 사람을 의지하는 삶을 버리고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라고 외쳤습니다. 만약에 계속 사람을 의지하고 세상 힘을 의뢰한다면 하나님께 징계받게 된다고 외쳤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거절당했고, 사람들은 그를 다 싫어했습니다. 예레미야가 가는 길을 참으로 외롭고 서러운 길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외면당할 수밖에 없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참선지자요, 하나님의 일을 맡길 종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당시에는 외로웠지만,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히 존경과 사랑을 받는 예레미야의 신앙 모습을 함께 배우기 원합니다.
1. 고립된 자를 찾아가시는 하나님
40년 선지자 활동기간 동안 사람들에게 항상 거절당하고 미움받았던 예레미야였습니다. 동료 선지자들도, 왕도, 백성도 그의 말 듣기를 싫어했고, 매국노, 적국의 스파이라고 오명을 씌웠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다가 매도 맞고, 멸시와 모욕을 당했습니다. 예언하며 다니지 못하도록 웅덩이에 가두고, 시위대 뜰에 가두고, 감옥에도 가두었습니다. 철저히 고립 되도록 통제당한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이름 뜻이 “하나님께서 던지시다”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 의욕도 없고, 보람도 없는 날들을 보내며 철저한 외로움에 빠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고립되어 있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찾아가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그에게 임하시니라” 시위대 뜰에 갇힌 예레미야를 처음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외롭게 고립된 사람에게 계속 찾아가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드기아왕 열째 해는 예루살렘 멸망이 매우 임박한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회개를 촉구하는 예레미야의 선포를 막으려고 가두었지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려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신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사람들도 하나님의 이런 계획을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갇혔으니 피난하지 않아도 됐고, 전쟁 포로로 잡히지도 않았습니다. 바벨론 군사들의 활과 창칼에 다치지도 않았고, 말발굽에 밟히지도 않았습니다. 전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예레미야를 철저히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마침내 전쟁이 끝나자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은 감옥에 있는 예레미야를 석방시킵니다. 예레미야를 안전한 곳에서 풀어줄 뿐만 아니라 원하는 대로 다 해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이것을 봐도 예레미야의 고립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혹시 현재 여러분의 상황이 너무나 외롭고, 수치스럽고, 무서울 정도로 고립되었습니까? 이루려던 꿈마저도 사라져 버렸습니까?사방팔방이 막힌 고립의 구덩이에 빠졌다고 생각될지라도 그 시간은 지나갑니다. 결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다면,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는 때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심
하와와 아담은 사탄의 말을 듣고 범죄 한 이후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살면서도 하나님 말씀보다 사탄의 거짓말을 더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류의 미련함은 점점 더 깊어지고 커져만 갔습니다. 점점 더 세속에 물든 육체의 사람이 되다 보니 하나님이 앞에 계셔도 못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모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제자들조차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기까지 합니다. 이렇듯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믿음의 세계는 눈에 보이며, 귀에 들리며, 손으로 만져지는 세계가 아닙니다. 오직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뵈옵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뵈옵는 사람들은 큰 환란과 고통의 고립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찾은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요셉, 한나, 다윗, 다니엘, 등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함께하지 않는 외로운 고립무원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은 사람들입니다. 욥 역시 처참한 고난을 통과한 후,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뵙는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시위대 뜰에 갇힌 예레미야도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보는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어 성취하시는 여호와” 자신이 창조주요 주관자 하나님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창조주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부르짖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낙심한 마음을 떨쳐버리고 전심으로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부르짖으라고 하셨습니다. 현실적으로 유다는 완전히 망했고, 자기가 할 일도 다 끝났다고 생각한 예레미야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모든 것이 끝났는데 더 이상 무엇을 부르짖어 구할 게 남아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끝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크고 은밀한 일을 보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예레미야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55장 8절과 9절에서 본질적 차이에 대해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하늘처럼 높고, 사람의 생각과 길은 땅처럼 낮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계속 찾아가셔서 말씀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상 예레미야는 멸망이 눈앞에 도착한 것을 감옥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 끝났음을 느낀 것이지요. 40년 순종한 사역의 끝이 너무 허무해서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예레미야에게 밭을 사고 문서를 토기에 담아 보관하라고 하셨습니다. 40년 동안 나라의 멸망을 선포하던 예레미야가 땅을 사고 땅문서를 토기에 담아 보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까요?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 그렇게 하는 것은 말과 행실이 다른 모습이 틀림없습니다. 비록 말씀에 순종하여 은을 달아주고 밭을 샀지만, 예레미야는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됐습니다.
예레미야가 땅을 사고 문서를 잘 보관해두는 것은 회복에 대한 확증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반드시 회복될 것을 예표하기 위한 하나님의 비유였습니다. 다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끝난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완전히 고립된 자에게 찾아가셔서 장래에 대한 큰 희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바벨론 유배기간이 칠십 년이 될 것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70년 후에는 돌아오게 하실 것을 선포했던 예레미야조차 예루살렘 회복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레미야에게 찾아오셔서 장래에 대한 희망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마침내 사로잡혀간 유다백성들은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에 예레미야는 이미 죽고 없었지만,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되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고립된 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아무 때, 아무에게서나 나오지 않습니다. 처절하게 외면당하고, 버림받은 고립무원에 갇힌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기도입니다. 세상이 주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고립된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 살다가 모든 것이 끝난 것 같고, 아무도 날 도울 수 없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 고립무원의 때가 하나님께 부르짖기에 적절한 타이밍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레미야가 시위대의 뜰에 갇혀 있었을 때가 바로 그렇게 고립된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예레미야를 찾아가서 만나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자신의 깊은 곳을 들어다 보게 해 줍니다.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만을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달려들었는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하나님 말씀을 얼마나 멀리 던져두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그것을 깨닫고 나서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해줍니다. 더 이상 세상 정욕과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에 끌려 다니지 않게 해 줍니다.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주고, 크고 은밀한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게 해 줍니다.
그런 사람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되고, 그 사람에게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따라다닙니다. 철저하게 고립된 곳에 갇혔다는 외로운 생각이 들 때, 하나님의 크고 은밀한 일들을 보게 될 것을 기대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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