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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주일 말씀

고통 중에서도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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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이유 

▣ 해결할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 

 

시편 107편 10절 ~ 16절  
10.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1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12.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13.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14.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  

15.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16. 그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시편은 전체 150편을 다섯 권으로 편집을 해놓은 책입니다. 107편에서 150편의 시는 바벨론 포로기부터 예루살렘 귀환 후의 시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07편은 구원의 하나님을 다 함께 찬양하자는 권면으로 시작합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이유에 대해서는 그분이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시를 읽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성품으로 우리를 돌보아주시고 계십니다. 아멘 

우리가 고난을 지날 때에는 슬픔이 가득 찰지라도, 고난이 지나가고 나면 감사가 나옵니다. 그때의 고통이 나를 새롭게 하고 강한 용사로 장성하게 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고난이 자신에게 유익(시 119:71)이라는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전 세계는 요즈음 총체적 고난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물론 더 고통스러운 사람과 덜 고통스러운 사람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가 힘든 시기입니다. 바벨론 포로지에서의 이스라엘백성들의 고통이 요즈음 우리의 고통과 비슷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 그들이나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고통에 처해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의 시편 가운데에서 사람이 어쩌다가 스스로 해결 못할 고통에 짓눌리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또, 어떻게 해야 스스로 해결 못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사람이 해결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이유
오늘 본문 10절은“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인권이 전혀 없던 고대시대 때 감옥에 갇힌 죄인들의 모습을 표현한 문장입니다. 캄캄한 지하감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무기징역 죄수들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빛줄기 하나 들어오지 않는 습습한 땅 속에 있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게다가 온 몸은 쇠사슬로 꽁꽁 묶여 있는 상태입니다. 천재지변으로 옥문이 열린다고 할지라도 도망갈 수도 없는 절대 절망의 상태입니다. 그들이 죽어야만 어둡고 차가운 감옥에서와 몸을 감고 있는 쇠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 상태에 처해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신세가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그들이 절대 절망의 죄인이 된 이유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육체와 영혼이 절대절망의 고통스러운 감옥에 갇히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멸시하기 때문입니다. 남유다 멸망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민족의 불순종과 죄 때문에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라고 외칠 때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거역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지존하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한 적이 없다고 스스로 믿었습니다. 온 백성이 죄를 짓고 있음을 깨닫지도 못하는 모습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분의 뜻을 멸시하는 길을 선택하는 백성들의 장래가 심히 염려스럽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로 점점 더 강력해진 배반과 반역의 악한 영이 사람들을 결박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영을 결박하는 배반과 반역의 쇠사슬을 끊을 능력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살 능력은 없습니다. 영은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살고 있지만, 육체는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이 왕 노릇하는 땅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미혹하는 배반과 반역의 영은 지금도 우리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어찌하든지 배반과 반역의 쇠사슬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꼼짝 못 하게 묶어두려 합니다.  

오늘 시107편의 시인은 바로 그런 절박한 절망의 모습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 어디에도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를 않는 어둠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두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스스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상태에 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는 사람들이 당할 수밖에 없는 고통입니다. 시인은 이런 죄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본문 12절에서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시107:12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하나님은 말씀을 거역하고, 멸시하는 사람의 마음에 고통을 주어 겸손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엎드러져도 도울 자가 없게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고, 도와주지 않으시니 해결할 수 없는 고통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고통에 빠지게 되면, 비로소 겸손해 지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나 외부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 절망과 곤고함의 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당하고 있는 고통의 원인을 남에게서 찾는다면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진 것이라는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문제를 만나고 고통을 만났을 때는 외부가 아니라 자신에게서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혹시 내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은 없었는가? 하나님 말씀을 내 편리를 위해 잘 못 적용하지는 않았는가? 깊이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를 촉구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선포를 듣기 싫어하고 거절함으로써 하나님을 멸시하고 거절했었습니다. 온 세상이 겪고 있는 현재의 코로나사태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뜻을 멸시했던 우리 죄악을 고치시고 겸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닐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는 결코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지 아니하고, 곤고의 쇠사슬에도 묶이지 않게 됩니다. 설사 그러한 고통 중에 처했을지라도 죽음에서 건지시고 회복시키시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요즈음의 어려운 사태 앞에서 모든 믿는 자들이 자신의 신앙 모습을 철저하게 성찰하는 특별한 은총의 기회로 삼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 해결할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
어느 누구도 사망의 쇠사슬을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흑암과 사망의 그늘을 벗어나고, 곤고의 쇠사슬을 벗어나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가위에 눌린 자가 꿈에서 깨어나야만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듯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되어야만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확실한 결론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사망의 고통에 직면한 모든 죄인이 곤고의 쇠사슬을 벗어날 길을 만드셨습니다. 
시인은 그 길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 뜻을 멸시할 때는 그들을 고통 가운데에 방치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며 부르짖는 기도를 드리면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이끌어 내시고 그들을 얽어맸던 쇠사슬을 끊을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심을 거듭거듭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지만, 회개하는 심령으로 진실한 기도를 드릴 때에 용서받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의 “부르짖음”은 큰 소리를 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절함, 겸손함, 진실됨”의 의미가 더 큰 표현임을 깨달아야겠습니다. 이런 부르짖음에는 이제는 주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겠다는 결단의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뢰해주실 만한 진실함과 충성됨이 있는 기도를 말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그런 신뢰를 받은 인물입니다. 애굽에서 이끌고 나온 모세를 원망하며 척박한 광야에서의 삶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터뜨리 던 백성들을 불뱀이 진중에 들어와 물어 죽여도 보호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백성들의 죄를 회개하며 기도하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는 불뱀을 만들어 바라보는 자마다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미리암이 백성의 지도자인 모세가 이방인 여자를 첩으로 들인 것을 비방했을 때에 문둥병이 발했습니다. 모세가 간절한 기도로 미리암을 위해 부르짖었을 때에 미리암이 치료를 받았습니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해 내시고 그들을 얽어맨 죽음의 쇠사슬을 끊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뢰하시는 모세가 자기도 죄인임을 고백하며 간절한 중보기도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들은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죄인의 기도를 기뻐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 많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인일 때에 그 아들을 우리 죄를 위한 대속 제물로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을 믿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마다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지금도 이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마다 사망의 쇠사슬을 끊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바로 그 은혜를 입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사람들이 아닌지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에게는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에는 흑암과 어둠의 결박을 푸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이름 앞에 모든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이름으로 흑암과 사망의 사탄의 세력들을 물리치는 기도를 하면 됩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을 바르고 사망의 세력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됩니다. 그러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게서 성령을 보내주셔서 담대하게 승리하게 해주십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는 피보다 더 붉은 우리의 죄를 흰 눈보다 더 희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먹보다 더 검은 우리 죄악을 양털보다 더 희게 하는 회개의 능력과 거룩의 권세가 있습니다. 보혈에 능력에 의지하여 회개하며 부르짖는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모든 죄와 허물의 용서해 주시고 이전보다 더 큰 은혜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부르짖는 기도는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말씀과 기도로 성령 충만 받으시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드림으로써 결박된 흑암의 세력을 물리쳐 주시는 은총을 입으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들의 삶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흑암의 세력들을 박멸해 주십니다. 시편 기자는 흑암의 세력을 물리치시는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던 고통의 놋문을 깨뜨리시고, 죽음의 쇠빗장을 꺾어버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부르짖는 자를 위해서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고통 중에도 희망을 다시 꿈꾸게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시인처럼 그분의 영원하신 사랑(인자)과 선하심을 인하여 찬양하고 또 찬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고치시고, 회복시키실 때에 말씀으로 자신을 살피도록 하십니다. 말씀이 회복되어야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는 규칙적으로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합니다. 주님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고치려고 무던히 애를 쓰게 하십니다. 말씀을 따라 가며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부르짖는 기도를 드리는 성도는 다윗과 같이 지금 내게 닥친 고난이 오히려 내게 복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자녀 앞에 있는 흑암의 놋문을 부수시고 죽음의 쇠빗장을 꺾어버리시는 큰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다시 한 번 더 감사의 찬양을 올려드리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고통 중에 있더라도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날마다 주님이 주신 말씀으로 흑암과 사망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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