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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주일 말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거듭 말씀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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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후의 등장

궁금증을 풀어주는 대답보다 영혼을 살리기 위해 거듭 말씀하시는 하나님

 

욥기 33장 13절 ~ 18절
13.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  
14.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  
15.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에 환상을 볼 때에  
16. 그가 사람의 귀를 여시고 경고로써 두렵게 하시니  
17.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18. 그는 사람의 혼을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을 칼에 맞아 멸망하지 않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고, 친히 인간이 되어보셨기에 사람을 잘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되어보지 않았고, 또 될 수도 없기에 하나님 생각을 알 수 없습니다. 욥도 그랬습니다. 자기 생각에 자기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 왜 그다지도 모진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대적하시고 죽게 하시는 분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고난 중에 있는 욥이 지친 자기의 생각대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을 우리는 듣게 됩니다. 세 친구들도 이런 욥이 걱정스러웠고, 엘리후도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세 명의 친구와 엘리후가 욥을 걱정하는 ‘관점’이 달랐습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께 자기의 고난의 이유에 대해 대답을 들으려는 욥과 거듭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권면하는 엘리후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엘리후의 등장  
욥기는 전체가 42장으로 되어 있는데 가장 많은 부분이 욥과 세 친구의 논쟁에 할애되었습니다.4장부터 31장까지 욥과 친구들의 논쟁이 스물여덟장이나 됩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주장하는 핵심은 ‘너는 죄인이다. 잘못한 게 있으니까 회개해라. 하나님은 잘못한 사람을 징벌하시고 잘하면 복 주신다.’라는 인과응보의 논리입니다. 욥도 그런 전통에서 살았기 때문에 친구들의 말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되 자기 자신에게는 결코 적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보기에는 뻔뻔스럽기 그지없는 죄인의 모습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끝까지 죄짓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욥과의 논쟁을 31장에서 일단락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32장에서 엘리후라는 젊은 친구가 등장합니다. 그 이름의 뜻이 '그는 나의 하나님'인 ‘엘리후’는 욥도 비판하고 욥의 세 친구들도 비판합니다. 먼저, 욥에 대하여는 “자신이 의롭다고 하는 주장”을 비판합니다. 욥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성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한다면, 하나님께서 불의하시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불의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찾아내시는 분이 아니요,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원수로 삼으시는 분이 아니라, 자녀 삼으시는 분입니다. 우리 발을 차꼬에 채우시는 분이 아니라 자유하게 하시는 분이입니다. 모든 길을 감시하시는 분이 아니라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릇된 이 모든 욥의 말에 대해 엘리후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욥기 33장 12절에서는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그대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의롭다고 말한 것이 욥의 죄임을 깨닫게 해 준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세 친구들에 대한 비판은 이 세 친구들이 욥이 죄를 지었다는 증거도 없음에도 정죄하고 판단한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세 친구는 하나님이 선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준다는 당시의 사변적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욥에게 적용했던 것입니다. 친구들은 욥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다시 복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권면하려 한 것이지요. 욥은 친구들이 말하는 그런 죄를 짓지 않았으므로 억울한 자기 입장을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엘리후는 그들 모두보다 한 단계 높은 신앙의 차원으로 올라갔습니다. 사람보다 크신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고난이 재발하도록 하시는 이유가 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이끌어 생명의 빛을 비추어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달은 엘리후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엘리후였지만 욥과 세 친구들이 인과응보 논쟁을 잠잠히 듣고 있었습니다. 그가 겸손한 참 지혜자이기 때문에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연장자들에 배우려는 연소자의 태도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말 잘하는 사람이 지혜롭다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지혜는 말 잘 할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들을 때에 얻을 수 있음을 깨닫기를 축복합니다. 참 지혜자 엘리후에게서 듣기를 잘하는 것이 지혜의 길임을 배우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궁금증을 풀어주는 대답보다 영혼을 살리기 위해 거듭 말씀하시는 하나님
욥기에 나타나는 욥과 친구들의 대화는 서로의 말에 대한 대답으로 이어집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말에 대해 호응하는 대답을 내놓지 않기 때문에 서로 다투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 역시 자기 말에 호응을 잘해줘야 제대로 대답을 잘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주셔야 응답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욥도 그랬습니다. 자기의 고통에 대해 호응해 주지 않는 친구들이 야속하고 밉고 대화하기도 싫었습니다. 이제는 자기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하는지 하나님께 직접 대답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시지 않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욥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역시 그렇게 역사하셨습니다. 욥기 38장이 되어서야 드디어 하나님께서 욥에게 직접 나타나십니다. 욥과 우리의 기대대로라면, 
“사탄과의 내기에서 네가 의로운 사람인 것을 증명해 주기 위한 고난이었다. 고생 많았다.” 이런 대답을 해 주셔야 욥의 모든 고난에 대해 명료한 대답을 받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42장이 끝날 때까지 욥이 고난에 대해 하나님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너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알고 있다면 대답해봐라”는 신정론적 질문을 시작하십니다. 욥의 고난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말씀들만 하신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이런 말씀들을 듣던 욥의 대답입니다.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자기보다 더 의로운 자가 없다고 주장하던 욥이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배워서 알던 하나님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하나님을 말씀 중에 뵈었다는 고백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자기의 생각에 대해 대답을 하실 필요도, 이유도 없는 분이심을 깨달았다는 고백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을 만바 뵙고 싶다면, 하나님 말씀을 많이 들으십시오, 성경을 많이 읽고, 설교를 많이 듣고, 기도와 찬양을 많이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자 회개한 의인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의”는 죄를 짓지 않음이 아니라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욥이 갑절의 복을 받은 것은 그가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회개한 의인이 되었기 때문임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이와 같이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천지차이로 다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 생각의 차이에 대해 이사야선지자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사 55: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사 55: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 55: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자기의 길과 생각을 버리고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높으신 하나님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려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도대로 응답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 의심합니다. 엘리후는 이런 류의 어떤 논쟁도 해서는 안 되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달은 지혜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질문대로 대답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 대답이 없을지라도 그분과 논쟁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이 기도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말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듭거듭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이 그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을 뿐입니다.   

왜 하나님의 거듭된 말씀에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자기가 듣고 싶은 말씀 하시지 않으니까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응답을 이미 하셨음을 깨닫게 하시려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거듭 말씀하십니다.엘리후는 그 중에 몇 가지 예를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꿈과 환상을 통해서 말씀합니다.    
저도 꿈과 환상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여러 번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원하는 응답을 받을 때까지 제 소원을 내려놓지 못할 때, 연 이틀을 똑같은 꿈을 연속으로 꾸게 하셨었습니다. 그 두려운 꿈이 너무나 선명해서 제 간절했던 소원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가 원했던 길이 사망으로 달려가는 길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을 외면하려할 때에 하나님은 꿈과 환상으로 계속 말씀하십니다.   

둘째, 질병과 고통을 통해서입니다.  
때로는 큰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질병으로 인해 먹을 수도 없게 하시고, 뼈만 앙상해질 정도로 마르고, 그 마음은 마치 구덩이에 빠졌고, 생명은 꺼져가는 등불처럼 멸망하게도 하십니다. 욥이 당한 고난의 경우입니다. 왜 이런 방법들로 거듭 하나님이 말씀하시는지를 16-18절, 29-30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교만한 행실을 버리게 하셔서 생명을 살리시려고”하나님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이 사람의 생각을 기준삼아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에, 살리시고자, 건져내시고자, 멸망치 않게 하시고자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한번, 두번, 다시 말씀하시고, 꿈과 환상으로, 질병과 고통으로, 재삼 행하셔서 고치시고, 회복시키시고, 살리십니다. 엘리후가 깨달은 하나님 말씀의 광대한 범위를 저와 여러분도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입맛에 맞는 응답을 받는 것보다,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꿈과 환상으로, 질병과 환경으로 거듭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닐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원하는 응답이 오기를 기다리며 거듭 되는 말씀을 외면할수록 우리의 장래에 희망이 사라지고 패망이 다가오게 됩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 생각에 초점을 맞추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영혼이 살아나는 회개에 이르러 갑절의 복을 받은 욥과 같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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