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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주일 말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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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내게로 오라

내게 배우라

▣ 내게로 와서 쉬어라

 

마태복음 11장 28절 ~ 30절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꿈을 꾸는 것과 같은, 그래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입니다. 꿈과 같은 인생, 한 번뿐인 인생이기에 시행착오도 많고, 두려움과 흥분과 기대도 많습니다. 이런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듣도록 하겠습니다.

1. 다 내게로 오라
주님이 우리를 “다 오라”고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다 내려놓고 몸만 오라는 게 아니라 짐을 진 채로 오라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의 문제, 근심, 걱정, 아픔, 슬픔 다 가지고 오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짐을 지고 모든 고통을 스스로 해결하려다가 지쳐 쓰러집니다. 주님께로 오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전에 예수님 당시의 세대들을 향해 마태복음 11장 16절과 17절에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무정하고 이웃의 일에 무관심한 인격들로 가득했다는 겁니다. 그들은 이웃의 즐거움보고 함께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웃의 슬픔을 보고도 함께 울지 않았습니다. ‘너는 너, 나는 나’라는 개인주의 이기주의, 편리주의가 이때에도 이미 팽배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경건한 요한은 귀신 들려서 사막에 살며 굶는다고 욕하고, 잘 먹고 마시는 주님에게는 음식을 탐하는 자요, 죄인들의 아류라고 욕하는 세대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을 회개하지 않는 것이요, 회개하지 않는 세대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같이 멸망을 당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0절에서 24절에 자기 죄를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마땅히 멸망을 당하게 될 세대에게 주님이 외치신 겁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왜 수고스럽고, 무거운 짐을 가득 진 것 같이 괴롭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회개하지 않기에 그렇다고 하십니다. 아니, 무슨 회개를 그렇게 많이 해야 한다는 겁니까? 말씀하시는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수 없이 회개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다 죄뿐인 인생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 시 14:2-3)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증언을 볼 때에 수시로 회개해도 우리의 죄를 다 회개하지 못한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성경의 증거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회개를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 모든 죄들은 우리 안에서 마음을 막고 하나님께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희락의 마음을 막고, 감사의 마음을 막고, 겸손과 온유의 마음을 막고, 절제와 충성의 마음을 막고, 사랑과 화평의 마음을 막고, 자비와 양선의 마음을 막습니다. 이런 죄들은 마치 혈관의 더러운 찌기들이 심혈관을 막아서 심장을 마비시키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피해를 주신 적이 없으셨고, 오히려 병든 자, 가난한 자, 귀신 들린 자를 치료하시고, 죽은 자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귀신들려서 귀신을 쫓아낸다, 창녀나 세리 같은 죄인들과 친한 저질이다라며 헛소문을 퍼트린 겁니다. 잘하면 잘하니까 이상하다 비판하고, 못하면 못한다고 무시하며 비판하고 이것이 타락한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모습도 이들과 비슷하지 않은가요? 예수님 당시의 세대들과 같이 오늘날에도 멸망당할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십자가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다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세대를 회개시키기 위해 오신 겁니다. 그런데도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자꾸 회개하라고 하냐?’고 하시고 싶다면 저의 말 말고 주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으시기 바랍니다. 회개하지 않음으로 꺾어지고, 문드러지고, 꼬부라지고, 철철 피 흘리는 상처로 불타는 것 같이 괴로운 마음을 가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부르십니까?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에 치료해 주시려구요. 위로해 주시려고요. 가르쳐 주시려고요. 그래서 영원히 죽어야 할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다 부르시는 겁니다.

인생이 힘들고 괴롭습니까? 오십시오,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해 주시려고 부르고 계십니다.

2. 내게 배우라
인생이 힘들고 괴로워 주님께 나온 사람들에게 주님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교만과 탐욕과 자기 자랑으로 무겁고 괴로운 짐을 가득 진 사람들에게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겸손과 온유의 멍에를 메고 계신 주님께서 주님의 멍에를 메도록 가르치시는 겁니다. 겸손의 반대가 교만입니다. 저 사람보다는 그래도 내가 조금은 더 났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교만입니다.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에 자기는 뭐든지 잘하는 사람,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런 마음이 시기와 질투를 부르고 이웃에 대한 불만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꾸짖을 때,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순수하게 아이를 위해서 책망을 하는 경우보다는 내가 아이보다는 훨씬 훌륭한 생각을 한다는 교만 때문에 내가 바라는 아이로 자라주기를 원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우리 자녀보다 더 잘난 부모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를 하나님의 계획대로 창조하셔서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100%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신다면 아이들 앞에서조차 겸손해야 함을 기억하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자녀들을 기르고 가르칠 때에도 항상 말씀에 근거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겸손하고 온유한 부모로서 자녀를 바르게 양육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겸손하고 온유하신 분으로써 수고하고 무거운 짐 인생들에게 “내게로 와서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겸손과 온유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자세입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 은혜를 입고도 주님을 대적하며 모욕하는 세대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하시려고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신 주님의 성품이 바로 온유와 겸손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주님께 나아가서 주님의 겸손과 온유를 배우시고 쉽고 가벼운 인생을 사는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내게로 와서 쉬어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을 쉬셨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제정하시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쉬라고 하셨습니다. “쉼”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요, 율법의 요구입니다. 그런데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진 우리는 “쉼”을 두려워합니다. 6일을 열심히 살았으면 하루를 주님과 함께 쉬어야 합니다. 쉬면서 하나님만 자랑하는 겸손과 온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쉼은 오락과 유흥이 아니라 주님 품에 안기는 겁니다. 주님 없이 사는 삶, 주님을 입술에만 모시고 사는 삶으로부터 주님께 안기는 삶, 주님이 나의 삶을 살아 주시는 삶으로 변화되어야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그분의 저서 <고통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에서 ‘데오 그라티아스’의 신앙으로 살라는 의미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후 1-3세기에 살았던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은 300년 이상 계속된 잔혹한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들에게는 불타는 신앙심을 입증이라도 하듯 그들끼리 만날 때마다 나누던 특유의 작별 인사가 있습니다. 그들은 뜨거운 사랑의 교제를 나눈 후 헤어지면서 “데오 그라티아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라틴어로 “하나님께 감사합시다”라는 뜻입니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그들은 모이기만 하면 “아, 저쪽 소아시아 어느 마을에 핍박이 일어나서 교회가 전부 문을 닫고 교인들이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대” 라며 긴장으로 차가워진 손을 맞잡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잡혀간 성도들이 곧 로마 경기장에서 짐승들의 먹이가 될 것이라는 정보를 나누며 공포를 안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을 것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핍박이 올 때 이길 수 있게 해 주소서!” 이렇게 기도를 마친 후 헤어지면서 “데오 그라티아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기도가 응답받고 마음의 소원이 이 세상에서 다 이루어져야만 행복한 삶일까요? 오늘 밤이라도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부르시면 세상의 소유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비록 교회는 다니지만 아직도 세상에 마음이 쏠리고 욕구 불만 때문에 그날그날을 마지못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복을 사모하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눈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에서 행복이 사라진 이 세대의 사람들은 매우 분주하고 지친 삶을 살아갑니다. 항상 저 사람 때문에 피해를 입게 되었다고 호소하며 괴롭게 살아갑니다. 직장 동료, 남편이나 아내 등 나보다 못한 사람 때문에 나만 손해 보는 것 같다는 피해의식으로 살아갑니다. 감사가 메마르고 원망과 불평과 미움과 시기로 가득한 일터에서 생존을 위한 경쟁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로 ‘나의 악이 남을 괴롭히는 것은 아닐까?’를 생각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인생 모습들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인생의 짐들을 가지고 주님께로 오십시오. 주님 품에 안겨서 겸손과 온유의 주님 멍에를 메고 쉽고 가벼운 인생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온전한 예배자로 주님 품에서 쉬십시오. 주님을 자랑하는 삶을 사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우리 주님의 음성 곧 듣고 주님 품에 안기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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