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으로 보고 경험해야 함
▣ 십자가의 사랑을 온몸과 영혼으로 겪어 경험함
▣ 하나님 은혜에 대한 확신
욥기 42장 3절 ~ 6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우리는 신앙을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내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신앙의 추상적 그림을 완전히 걷어내야 합니다. 막연함의 상상치로 신앙을 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게 되는 순간 3차원을 벗어나고 물질세계를 넘어서 보이지 않는 세계, 영의 세계에 눈을 뜹니다. 즉, 땅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일을 보게 됩니다. 신앙은 영적 세계입니다. 하나님과 욥의 대화 중 욥은 하나님과 마귀의 대화를 알지 못합니다.
마귀는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만큼 욥에게 고난을 줬습니다. 욥은 갑자기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영적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욥이 고난을 당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아는 척합니다. 이치를 따졌습니다. 그들은 욥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를 이치를 따져 밝히려 했지만 전혀 맞지가 않았습니다.
우리도 성경을 읽지만, 사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물론 공부하면 지식적으로 알 수 있지만,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과 하늘의 일과, 영적 세계가 있음을 알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가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눈으로 보고 경험해야 함
우리는 알고 말하는 것보다 모르고 말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신앙세계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성경공부를 할 때도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자신의 잣대로 재단하여 정의하려 합니다. 고난을 통해 욥도 신앙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귀로 듣기만 했다는 것은 욥이 이론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열심히 배운 말씀이 지식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이 얼마나 대단하지 경험하지 못한 채 말씀이 이론으로, 개념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밥은 매일 살기 위해 먹어도 결국 죽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밥 먹는 것에 매여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받은 우리 모두는 진리를 계속 경험하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진리 즉 영적 갈증을 해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많은 정보와 지식으로 넘쳐납니다. 사람들은 지식을 쌓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쏟아붓습니다. 지식을 힘이라 생각합니다.
지식은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도움을 줍니다. 지식이 없으면 고생을 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거대한 문제를 만나면 전문적 지식을 가져도, 정신적 수련을 쌓았어도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지식을 많이 쌓았다고 해도 그것이 능력이 되는 것은 아니기에, 인생에 문제를 만나면 성경 지식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귀로 듣기만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신앙인은 아닌지 뒤돌아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욥이 귀로 듣기만 했다고 고백한 후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경험적 신앙입니다. 욥은 긴 고난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동안 욥은 지식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았지만, 고난을 통해 이제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편 기자는 고난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배우게 되었나이다”는 지식적으로 배우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고난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에 대해 지식적으로 알았고, 교리적으로 이해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을 배웠지만 교리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고난을 겪은 후에는 그 동안 알고 있던 지식이 가슴으로 내려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주신 사랑을, 고난을 통해 구체적으로 경험하여 신앙의 추상화를 걷어내고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십자가의 사랑을 온몸과 영혼으로 겪어 경험함
마태복음 26장 26절부터 28절까지의 말씀은 최후의 만찬을 행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이 말씀으로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 인육을 먹는다고 생각해 성도들을 오해하며 핍박했습니다. 성찬을 통하여 떡과 포도주를 먹는 행위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며 기념하는 정도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의 삶 속에 녹여내야 합니다. 지식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과 영혼이 경험해야 합니다. 또한 성찬을 행하는 가운데 성령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할 때 스스로를 잘 준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죄를 깊이 회개하고 기도하며 주실 은혜를 사모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해야 합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단순히 떡과 잔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찬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 안에 내재화되어야 합니다. 시편 34편에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에 비유했습니다. 여호와의 성품이 우리의 구미를 당기고, 느끼게 하고, 반응하게 한다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끌어당기는 매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계속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어 하도록 하십니다.
시편을 읽어 보면 표현이 상당히 거칠고 솔직합니다. 숨 막히는 고난을 겪는 가운데 시를 썼기 때문입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지른 절규를 기록한 것이 시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말씀을 삶 가운데서 실제로 경험할 때 신앙이 깊어집니다. 또한 삶 가운데 말씀이 검증될 때 신앙이 깊어집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주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을 때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나중에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실패하여 도망간 베드로를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때 베드로는 큰소리치지 않았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말함으로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을 고백하며, 주님이 자신을 더 잘 아신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세상에서든 신앙에 있어서든 어느 정도 지식이 쌓이고 위치에 오르면 자신이 아는 것을 떠벌리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게 됩니다. 베드로도 시행착오를 통해 뼈아픈 경험을 한 뒤에야 주님을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테이블에 앉아 고난을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이야기로 고난을 경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고난을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은 고난은 이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온몸과 영혼이 겪는 고난을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방법을 통해서 체험되어야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알았고, 잘 섬겼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긴 여정을 통하여 그는 하나님을 새롭게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경험한 고난의 중심에 계셨습니다. 처음에는 욥은 고난의 여정 속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힘들었습니다. 또한 이유를 알 수 없어 고통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우리 삶 가운데도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대가를 지불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편안하게 꽃길만 걸으며 예수님을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론이 아닌 실체를 경험하려면 반드시 고난을 경험해야 합니다. 믿음은 신뢰 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려움이 닥치면 무너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뢰는 경험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을 실체화하지 않으면 우리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독특한 방법인 고난을 통해 지식을 실체화하여 신앙의 추상화를 벗고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 은혜에 대한 확신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확신할 수 있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는지를 보면 우리의 신앙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체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지속된 관계를 통해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실체화하여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실제적으로 경험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 우리의 삶을 맡길 수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경험한다면, 그 십자가 사랑을 온전히 경험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 우리의 삶을 전부 맡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우리의 머리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리스도께 우리의 삶을 맡기지 못합니다. 십자가 사건이 체험되어서 우리 가슴에 파고 들어와야 합니다. 성찬을 통해서든, 십자가의 메시지를 통해서든, 묵상을 통해서든, 고난을 통해서든 십자가가 우리 마음 안에서 녹아져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맛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선하심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 사랑입니다.
우리가 실체적으로 십자가를 경험하면, 우리 삶에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십자가를 구체적으로 경험하면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삶을 하나님께 위탁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랑을 구체적으로 체험하지 못했기에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욥기를 보면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욥기 전체에 많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뒷전에 밀어둔 가운데 욥과 친구들은 본인들의 지식으로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이론 싸움을 했습니다. 각자 자신의 추측과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또한 욥이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데도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의 시간을 통하여 욥은 마침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욥은 대가를 지불할 만했습니다.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지만, 욥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욥의 인생은 축복받은 인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온갖 고통을 겪은 뒤에 찾아오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23편을 보면 다윗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이는 시상이 떠올라서 멋진 단어를 조합해 쓴 시가 아니라 다윗이 직접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큰 고난을 겪을 때 시편 23편에 나오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표현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윗은 수많은 시련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뼛속까지 밀고 들어오는 아픔을 느끼는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다윗은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삶 가운데 다가온 실패로 죽음 직전까지 갔을 때 만나주시는 하나님은 평소 설교 시간에 듣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고난은 삶을 명료하게 합니다. 삶의 모든 군더더기를 모두 제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당한 고난보다 더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평소에는 기도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깊이 경험해야 하는데, 평소에는 그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계속해서 기도했음에도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를 해도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기도는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 있을 때는 입이 아닌 가슴속 깊은 심장에서 나오는 절규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고난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 되지 않습니다. 그럴듯하게 자신을 꾸밉니다. 자신을 합리화하며 자존심을 지키려고 노력을 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시지 않습니다. 기도의 자리에 앉아 있지만 하나님과 교감이 없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무료하게 느껴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을 종교 활동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감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심장에서 나오는 절규로 기도하십시오.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하에 모든 일들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귀가 아무리 시험해도 깨어있어서 시험에 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계획이 우리를 승리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고 있습니까? 그러나 고난에 빠지게 된 본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더 깊이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경험하면 우리 인생에 어떠한 고난이 닥쳐도 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안다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온전히 믿는다면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음으로 붙잡고 살아간다면 무적의 인생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말씀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 간다면 우리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마귀의 공격에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을 이기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갈 때 어떤 고난과 시험이 와도 이기고 남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온몸과 영혼으로 겪은 고난을 통해 얻은 교훈으로 신앙의 추상화를 걷어내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 > 주일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단련을 시키시나 (0) | 2022.04.27 |
---|---|
성령으로 충만한 부활신앙 (0) | 2022.04.19 |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삶 (1) | 2022.04.05 |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선택하시는 기준 (0) | 2022.03.27 |
문제를 만났을 때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 (0) | 2022.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