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의 신앙인으로
▣ 성령 충만 받아야 부활의 신앙으로
사도행전 1장 3절 ~ 5절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시다. 생명과 부활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께 하나님의 생명과 평강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날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기쁜 소식뿐입니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부활의 기쁜 소식이 간절한 시대입니다. 이 땅에 가슴 아프고 절망스러운 소식이 가득한 이때,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는 것이 부활의 기쁜 소식입니다. 부활의 기쁜 소식은 오늘의 절망적인 소리를 희망의 소리로 바꾸는 소식입니다. 새 힘과 용기로 삶에 변화를 주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소식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고 아름다운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듣고 부활 신앙으로 살아간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오늘날 삶 속에서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 부활의 경험이 우리에게 죽음이 생명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질병이 치유로, 위기를 기회로 가져다줄 것입니다. 이번 부활절을 통해 세상의 절망적인 소식의 소음으로부터 자유 할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가정과 범사에 총체적 변화가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이번 부활절 예배를 통하여 성도들의 예배가 회복되고, 우리의 삶이 회복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나누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1. 부활의 신앙인으로
이번 부활절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충심으로 기도할 때에 희망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 정의가 살아있기를 원하십니까?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나라를 원하십니까? 다음 세대에게 어떠한 나라를 물려주고 싶으십니까? 그 무엇보다 마른 뼈도 일으키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앙으로 가득한 복음의 복된 나라를 물려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앙으로 기쁨이 가득한 복음의 복된 나라가 바로 정의와 공정과 상식을 담고 있는 나라입니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제자들이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와 순교하면서까지 주님의 부활을 외칠 수 있었던 배경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던 주님이 다시 사셨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보고 체험했기에 수제자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었습니다. 바돌로매는 몸의 가죽을 벗기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순교했습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도하며 순교하였습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창에 찔려 순교를 했습니다. 안드레는 에데사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습니다. 맛디아는 예수살렘에서 돌에 맞고 쓰러진 뒤 목매임을 당했습니다. 누가는 헬라에서 감람나무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칼에 목이 떨어지면서도 예수 이름을 부르다 죽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백 살까지 온갖 시련을 다 겪다가 죽었습니다. 죽음이 무서워서 도망쳤던 모든 제자들이 이렇게 순교하면서까지 외쳤던 메시지가 주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이들이 순교하면서까지 주님의 부활을 외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목격함으로 목숨도 아끼지 않고 부활의 신앙을 외쳤던 것 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고난 가운데 만나고 체험해야 합니다.
부활의 신앙을 체험하고 경험함으로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성령의 충만으로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믿는 것으로 끝나지 마십시오.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마십시오. 부활신앙으로 우리의 삶을 이어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을 믿고 부활을 찬양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부활신앙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신앙이 우리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부활을 믿고, 찬양하는 의미가 없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 부활을 이해하는 정도로 끝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말로 하는 것으로 끝낼 수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사실인데 어떻게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 있는 성경이 사실이라고 믿습니까?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주시죠? 주님의 부활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바로 부활의 신앙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서 계셨을 때 선포하신 모든 말씀이 진리라는 확증인 것과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확증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서 선포하신 모든 메시지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영원토록 살아계셔서 어제나 오늘이나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을 역사적 사건으로 알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믿는 우리들이 부활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부활의 신앙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서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삶이 저와 여러분 모두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성령충만 받아야 부활의 신앙으로
우리의 삶이 부활신앙이 되고, 우리의 삶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려면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주님께서는 40일 동안 제자들과 자주 만나셨습니다. 4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여자들이나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만난 것 외에도 열 제자들과 한꺼번에 만나셨고, 나중에는 열한 제자들과 함께 만나시기도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6절에서 8절을 보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보이셨다는 것을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알고 감동받고 기뻐하는 것으로만 끝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처럼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감동받고, 기뻐하고, 놀란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갈릴리 바다에서 아침 식사도 하였습니다. 부활의 주님과 대화도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지만, 감동하고, 기뻐하고, 흥분은 하였을 뿐, 부활신앙이 삶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모두 다 다락방에서 숨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보고도 부활의 신앙으로 살지 못하던 이때, 그들에게 오순절 성령충만 사건이 일어납니다. 신앙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이적을 체험했더라도 오순절 성령 사건이 없이는 안 됩니다. 우리 인간의 상태를 최고로 잘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셔서 모든 제자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 외에 주님을 따르던 오백여명에게도 만나 주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부활의 신앙으로 삶을 살아가지 못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을 때 감동받았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심도 했습니다. 기뻐 뛰면서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심과, 그 감격과, 그 기쁨이 그들의 삶 속에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았을 때, 그 결심과 그 감격과 기쁨이 그들의 삶 속에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제 부활한 내 모습을 직접 보았으니깐 예루살렘에 나가서 복음을 담대히 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4절과 5절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을 목격한 것만으로, 감격한 것만으로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부활신앙이 우리의 삶이 되어 살아가려면 성령으로 충만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선택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 삶의 필수인 것입니다.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삶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게 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없었다면 주님의 부활의 선포도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은 목격했지만 선포할 만한 능력이 제자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선포할 수 있는 능력, 부활신앙의 삶을 살 수 있었던 능력은 바로 오순절 성령 충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아무리 잘났어도 인간입니다. 인간은 천사가 아닙니다. 아무리 거룩한 척해도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 죄의 자녀들입니다. 억울해도 할 수 없고, 원통해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인류의 첫 사람인 아담처럼 죄의 속성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나는 죄의 속성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분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남의 죄를 손가락질 할 수가 없습니다. 나도 그와 같은 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느 죄의 속성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이 죄의 속성을 이기며 살 수 있는 비결이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죄의 속성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기며 사는 비결은 있습니다. 죄의 속성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기적을 체험하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그 많은 기적을 본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께서 잡히실 때 왜 모두 도망자가 되었습니까? 병이 고침 받으면 됩니까?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고쳐주신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병 고침, 기적. 이러한 사건들이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고, 기쁨을 주기는 하지만 이것이 신앙의 능력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오순절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능력이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고 누가복음 24장 29절에서 말씀하십니다.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그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떠나시기 직전에 무엇을 우리에게 주실까 기대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은 오병이어와 같은 능력을 행할 수 있는 권능, 바람이나 파도를 명령하는 능력, 또는 병든 자, 귀신 들린 자들을 치료하는 능력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기대를 가지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위로부터 오는 능력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성령이었습니다. 세계 복음화라는 엄청난 사명을 맡기고 떠나시면서 주신 약속은 위로부터 오는 능력, 성령 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능력은 성령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부활의 신앙으로 살려면 위로부터 오는 능력,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 성령을 받아 부활의 신앙으로 각자에게 주신 사명 잘 감당하며 작은 예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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