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2장 34절 ~ 40절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창조를 마치신 후에 가장 먼저 세우신 공동체인 모든 가정을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위해 하와를 창조하셔서, 중매하시고, 주례하시고, 부부 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꿈꾸는 아름다운 가정은 어떤 모습일까요? 가족의 인물이나 성품이 좋은 가정?, 예술이나 문학 등에 재능이 뛰어난 우아한 가정?, 귀중한 보배들로 잘 장식된 집에 사는 가정? 그런 외적인 가치보다는 온 가족이 서로 사랑하는 가정이 더 아름다운 가정일 것입니다. 가정이야말로 사랑으로 아름답게 세워야할 행복 공동체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에 대하여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고, 입술로 많이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 “사랑”이 각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어떻게 자기 삶에 경험되는지 말씀을 상고하면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하라’는 명령 248개와 ‘하지 말라’는 명령 365개를 합하여 무려 613개에 이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을 기준으로 613개의 방대한 율법 준수 조항으로 사람이 만들어 늘려놓은 것입니다. 613개의 조항이 10개로 축약되어있는 십계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는 하나님과 관계된 계명입니다.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는 이웃과 관계된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율법과 십계명을 두 개로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너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격에 두신 것입니다. “강령”은 ‘반드시 지켜 행해야 하는 핵심 규칙들’을 일컫습니다.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등하게 행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듯이 이웃을 동일하게 사랑하면 모든 율법을 다 지키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율법 전체를 단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바로 ‘사랑’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의 형편과 처지에 공감해 주시고, 필요를 채워주신 사랑입니다. 자기를 저주하고 침 뱉으며 조롱하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신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해야함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는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사랑”은 하나인데 사랑에 대한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됩니다.예수님을 찾아온 바리새인들도 “사랑”에 대하여 다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 시대의 성도들도, 오늘날 우리들도 “사랑”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외하고 신약 성경에는 정말 “사랑”을 제대로 보여주시는 인물이 한분 있습니다. 금수저로 태어난 사도바울이 왜 스스로 흙수저가 되어 가난과 추위와 굶주림을 찾아다녔을까요?왜 잠도 못 자면서 교회들을 근심해야 했을까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 어떤 것임을 깨닫게 된 바리새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은 특권층 바리새인으로 살 수 없도록 사랑에 대한 진리를 알게 된 것입니다. 가장 큰 계명이 어떤 것인지 예수님을 시험하던 바리새인들은 과연 어떤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었을까요? 처절하게 자기를 희생한 바울 사도와 같은 이런 사랑에 대하여 과연 알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약 성경의 모든 율법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는데, 무엇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까? 바로 모든 율법의 요구,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사랑의 계명을 완성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수직의 나무와 수평의 나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수직의 나무는 하나님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셨습니다. 좋아서 십자가에 달린 게 아니라,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수평의 나무는 이웃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당신을 조롱하고, 때리고, 십자가에 못 박은 무리들을 위해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을 저주하는 원수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절정을 보여준 결정체입니다.
우리도 사랑의 계명을 지키려면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희생과 고통이 따르는 법입니다. 십자가 사랑에는 눈물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희생과 눈물이 없는 사랑은 진실 된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눈물과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희생과 고통을 감당해야 합니다.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희생과 고통을 감당할 때 사랑스러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웃을 사랑한 많은 예가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하며 개처럼 취급받던 이방인과의 혼혈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여행 중이었는데,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자에게 응급조치를 하고는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이튿날은 주막 주인에게 비용을 주고 더 드는 비용은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 부탁을 하고 떠났습니다. 정통 유대인 지도자들인 제사장과 레위인도 지나는 길에 이 강도만난 사람을 보았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율법이 정한 제사 의식에 꼬박꼬박 참석했습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금식하며 기도도 했습니다.
그러나 길에서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이웃에 대하여 사랑을 실천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곤란을 겪는 이웃, 나에게 피해를 끼치는 이웃을 위해 자기의 몸과 시간과 재정을 내어 놓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어려운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어려움 당한 이웃을 멸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축복하는 사람입니다. 강도 만난 이웃에게 자기를 희생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나에게 감당시키시는 자기 십자가를 울면서라도 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밤을 새워 잠 못 자고 근심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할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가장 사랑스럽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한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이 두 사랑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르는 우리 성도들과 가정에 모든 것을 더하여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축복합니다.
'성경 > 주일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복 (0) | 2020.06.13 |
---|---|
참 소망이란? (0) | 2020.06.08 |
모든 희망은 오직 주님 (0) | 2020.05.23 |
두 종류의 믿음 (0) | 2020.05.16 |
사랑과 신앙으로 결속되는 가정 (0) | 2020.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