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택하신 자를 영화롭고 힘 있게 하시는 하나님
▣ 믿음의 눈을 들어 주가 하시는 일을 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사야서 49장 13절 ~ 18절
13.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14.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17.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18.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를 장식처럼 몸에 차며 그것을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고 은혜 받을 이사야서는 선지서입니다. 구약에 기록된 17권의 선지서 중에 가장 앞에 나오는 선지서가 이사야서입니다. 이사야서를 기록한 사람은 선지자 이사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사야는 왕족이었으며,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남유다만 남은 시대에 사역했습니다. 이사야보다 먼저 사역한 선지자들은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입니다. 이사야는 이들보다 조금 뒤에 활동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서가 선지서 중에 맨 앞에 있는 것은 66장이라는 가장 많은 분량과 내용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66장은 신구약 전체 성경의 권수와 같은 숫자입니다. 구약성경이 39권인 것처럼 이사야 1장부터 39장은 구약의 성격을 띱니다.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과 회개를 강조했습니다. 40장부터 66장까지의 후반부 27장은 신약성경의 성격을 띱니다. 구원과 소망, 용서와 회복이 약속과 위로의 말씀으로 선포됩니다. 이사야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입니다. “이사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라”입니다. 이사야서는 어느 선지서들보다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가장 많이 하고 있습니다. 특히 53장은 고난 받는 종에 대한 내용으로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를 ‘복음적인 선지자’로 명명하고, 이사야서를 ‘제5복음서’라고도 합니다. 신약성경에서도 472회나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49장에도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의 약속이 선포되어있습니다. 이사야 40장 1절에서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회복이 선포된 이후에,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바벨론이 바사의 고레스에게 멸망당할 것이요, 예루살렘과 유다백성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예비되어 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장래에 대한 희망도 사라지고 두려움과 절망이 그들을 뒤덮는 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처지의 백성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의 믿음을 세우시려고 이사야에게 회복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의 선포를 듣고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세우는 위로와 도전의 시간을 갖기를 축복합니다.
1. 택하신 자를 영화롭고 힘 있게 하시는 하나님
이사야 49장 1절에서 7절에는 “나”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여기에서의 “나”라는 인물은 “이사야, 이스라엘 백성, 메시야”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3절의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 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4절은 이사야가 하나님께 드리는 독백과 같은 탄식과 희망입니다. 이사야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부르셨고, 이름을 기억하셨고, 날카로운 칼, 번쩍이는 화살로 만드셨다고 합니다. 매우 존귀하고 뛰어난 용사로 이사야를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나의 종,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자기의 부르심과 사역에 대한 열매로 인해 4절의 자기 정체성을 고백합니다.
민족 구원과 예루살렘 보전을 위해 최선을 다한 모든 사역들이 다 헛것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웃시야왕 때부터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왕조에 이르기까지 회개하고 예루살렘 멸망의 심판을 피하자고 외쳤었는데 결국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말았다는 탄식입니다. 열심과 최선을 다 했던 60년 사역이 엉망진창 된 것을 보는 허무한 마음을 토로한 것입니다. 동시에 자기 사역에 대한 판단과 보응도 하나님께 있기에 그는 새로운 하나님 음성을 들었습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7절의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는 새 정체성 확립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모이게 하시는 분이요, 이사야를 영화롭게 하시고 힘이 되신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종이 되어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일은 쉬운 일이다. 이사야는 이방의 빛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할 종이다. 이사야는 사람들에게는 미움, 멸시, 천한 종이었지만, 하나님께는 택하신 존귀한 자다. 헛되고, 무익하고, 공연히 힘 뺀을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벗어던지고, 하나님께 계속 사용될 존귀한 종이라는 정체성으로 자기를 재점검받았습니다.
7절에서 “왕들이 보고 일어서며, 고관들이 경배한다”는 표현은 순종하는 자를 존귀하게 여기시는 자에게 얼마든지 베푸시는 하나님의 격려와 위로의 말씀입니다. 멸망한다는 메시지를 60년 동안 선포해도 아무도 믿지 않았던 것처럼, 앞으로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이라는 선포를 할 때 역시 아무도 믿지 않을 백성들인 줄 알면서도 하나님 말씀을 선포해야할 종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더 위로하시고 격려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주의 일을 감당하도록 부르심 받은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동일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오늘 4절의 이사야의 탄식이 저와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는 없었습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전혀 모르겠을 때가 우리는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과 내게 이 삶을 허락하셨다는 믿음이 없다면 당장 무너질 것 같습니다. ‘현재의 이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며 우울하고 허무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허무하고 무의미하게 살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6절 말씀을 우리에게도 뚜렷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오늘 들으시기 바랍니다. 함께 읽으시며 자기 자신에게 선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고 힘이 되어 주시기에 매우 쉽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실 이사야 6장 1절에 보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 후 60년 동안 멸망당하지 말자고 목이 터지도록 부르짖었던 그의 사역은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로 온전히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 없어 다 멸망당하고 바벨론에 사로잡혀갔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생각하기에는 다 같이 실패하고 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사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함께 실패한 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여전히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도록 선택받은 종이요, 이제는 이스라엘 뿐 아니라 열방을 향해서 구원을 선포할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의 고난과 아픔과 실패와 좌절은 우리를 실패자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과하는 동안 우리가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구원을 땅 끝까지 전파할 종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고생과 눈물과 땀이 무익하게 사라지게 하시는 하나님이 결코 아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인 존귀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우리의 고난 끝에는 반드시 왕들이 우리를 보고 일어서며, 고관들이 경배하게 하실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끝까지 견디고 이겨내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그것을 확실히 알고 믿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믿음의 눈을 들어 주가 하시는 일을 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어서 이사야는 49장 8절에서 13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으로부터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새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 “은혜에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말씀하셨고, 10절에서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이가 그들을 샘물 근원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1절에서는 그들이 돌아올 길을 친히 만드시겠다고 하셨고, 12절에서는 동서남북에서 그들이 돌아오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3절에서는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믿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고 잊으셨다고 주장합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의 다른 이름인데, 이스라엘 백성을 비유하는 호칭입니다. 자기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하나님 말씀에 백성들이 14절로 대답했습니다. 14절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딱 자기 수준으로 모든 것에 대하여 말하고 생각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14절에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버리고, 잊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성경을 읽어볼 때 누가 버린 자이고, 누가 잊어버린 자였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우상을 섬겼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자기 생각대로 살다가 심판받은 거 맞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주체인 자기들만 모르는 이스라엘에 대해 객체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한 맹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 정복을 마치고 세겜에서 마지막 고별설교를 할 때 백성들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맹세했지만, 그들은 얼마 안 지나서 이 맹세를 버렸습니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만을 잘 섬기겠다는 맹세를 하고도 쉽게 맹세를 잊는 이 모습이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로 뼈 속까지 유전된 우리의 죄의 성품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입술로 맹세한 그대로 살아갔다면, 후손들이 보고 배워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백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맹세를 쉽게 던져버리고 자기 육체의 정욕대로 살아갔기에 후손들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는 세대로 자라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라난 후손들은 신실하신 하나님에게 우리를 버리고 잊으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 15절입니다.
자식을 낳은 어미가 자기 자식을 불쌍히 여기고 잊지 못하듯이 잊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사람 중에는 자기 자식을 잊는 자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택한 자녀를 잊지 못하신다고 하십니다. 사실 요즈음 뉴스를 보면, 무정한 어미들이 참 많습니다. 자식을 버리고, 굶기고, 학대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어미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버리지도 떠나지도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버린 사람일 지라도 한 번 택한 자녀를 계속 찾아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계속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위해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문신처럼 손바닥에 새겼다고 하십니다.
백성들을 손 안에 올려놓으시고, 그들을 보호할 성벽을 항상 세워놓겠다고 하십니다. 그 결과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 바벨론은 떠나가고, 그들의 자녀들은 예루살렘에서 건강하게 살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전에는 멸망당할 것을 각성시키던 이사야가 이제는 회복될 장래를 꿈꾸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자기들의 현실을 바라보고 있기에 그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 아니라 자기 실력으로 살아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만 인정하고 믿을 수 있다는 현실주의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백성들에게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눈은 육체의 눈이 아닙니다. 육체의 눈에는 절망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포로지의 현실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눈을 들어 올리면, 수많은 자녀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 오는 게 보입니다. 혼인식에서 신부가 아름답게 치장한 장식처럼 그들의 자녀들이 회복되는 것이 보입니다. 예루살렘 회복은 그처럼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브라함을 그들의 조상으로 세우신 하나님, 이삭과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하나님,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 다윗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그 언약들을 신실하게 지켜 오신 하나님이 현실을 보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라고 하십니다. 믿음의 눈을 들어야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을 들어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과 다시 언약을 맺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포로지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희망 없는 현실을 바라보며 절망하고 있습니까? 지금 이 시간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수준으로 끌어내려서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초월자이심을 성경은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헤아리고 연구해도 도저히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오직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찾을 때 계시해 주시는 그 부분만큼만 알고 있음을 인정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눈을 들어 그분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더 알게 하시고 그분이 하시는 일들을 보여 주시려고 믿음의 눈을 들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듣는 지금 이 시간, 현실에 고정되었던 우리의 눈을 들어 현실 위에서 일하고 계신 주님, 전지전능하신 초월자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늘도 노래하고, 땅도 기뻐하고, 산들도 즐거이 노래하며 우리에게 위로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위로와 긍휼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하나님이 원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를 영화롭고 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세상을 향하던 눈길을 멈추고, 믿음의 눈을 들어 주가 하시는 일을 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십시오. 우리 모두가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위로와 긍휼을 풍성하게 체험하는 종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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