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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주일 말씀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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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적 현실로 인해 부르짖는 사람들

▣ 주를 경외하는 자가 바라고 기다리는 것

 

시편 130편 1절 ~ 6절
1.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2.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5.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6.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우리는 문제 많은 세상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로 살아야 하는 인생입니다. 우리 앞의 태산과 같은 문제로 인해 절망하고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모든 짐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어주셨습니다. 우리 대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 질병의 고통도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항상 기도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항상 빌어주시는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기억하시고 어떤 어려움이 다가와도 당당하게 맞서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시편 130편의 시인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은 진정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시편 130편을 통해서 무거운 인생 짐을 지고 있는 우리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1. 절망적 현실로 인해 부르짖는 사람들
현대 과학의 발달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신속하게 찾아냈고 백신과 치료제 개발을 서두르며 사회적 거리두기와 개인위생 관리로 방역을 잘하고 있으니 그나마 감사한 일입니다. 반면에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는 예방과 치료의 혜택이 공평하게 진행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빈곤한 국가에서는 백신과 방역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백신도 없고, 마스크도 없고, 손 세정제도, 물도 없고, 식량도 없는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의 현실입니다. 코로나 역병이 빨리 소멸되기를 간절히 부르짖어야 할 가장 큰 이유가 이것이 아니겠는지요?   

우리의 일상 회복과 예배 환경의 회복보다 더 간절하게 부르짖어야 할 이웃의 고통입니다. 절망적 환경에서 부르짖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도 함께 부르짖어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우리 믿는 사람들은 고통과 절망에 처할 때에 부르짖어 기도할 하나님이 계셔서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부르짖는 기도를 항상 들어주셨습니다. 오늘 시편 130편 1절과 2절에서도 예배드리러 성전으로 올라가는 시인의 부르짖음이 있습니다.  

그는 “깊은 곳에서”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바다를 뜻하지만, 시인의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극심한 절망적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가는 시인에게 어떤 위기가 닥쳤기에 극심한 절망 상태에서 부르짖었을까요? 3절의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에서 우리는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NIV 영어 성경으로 보면, “If you, O LORD, kept a record of sins, O Lord, who could stand?”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 죄들을 계속 기록하셨다면 누가 주 앞에 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가 하나님과 자기 사이를 가로막고 자기를 절망의 늪에 가두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죄가 있는 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던 율법의 시대였습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반드시 죽임을 당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를 계속 기록하고 기억하신다면 시인이 어떻게 성전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깊은 곳”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소통이 끊어진 “절망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자기 스스로는 죄를 용서해 줄 힘도 자격도 없기에 깊은 곳에서 부르짖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깊은 곳에서의 부르짖음”을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욥이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중에 깊은 곳에서 부르짖었고, 하나님 말씀이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스로 도망가던 요나가 깊은 곳에서 부르짖었고, 밧세바와 간음한 다윗도 그랬습니다. 이런 인물들의 깊은 곳에서의 부르짖음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에 자기가 옳다고 느껴지는 것을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를 깊은 곳으로 끌어 내린다는 사실입니다. 그 깊은 곳에서 몸부림치며 부르짖게 합니다. 철저한 의인으로 살았던 욥이 그랬습니다. 욥은 자기가 당하는 기막힌 고난의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처음엔 그래도 입술로 범죄 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니 거두어 가시는 때에도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 마땅하다면서 아내를 달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왜지?’ 하는 갈등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다투는 동안 계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깊은 곳에 처한 욥은 그 입술로 이런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은 죄들을 잘 생각해 보라는 친구들에게 자기를 괴롭히는 자들이라고 다투고, 차라리 하나님께서 오늘밤이라도 죽이셔서 다음 날 해를 보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고, 의로운 자기에게 왜 고난을 주시는 건지 하나님을 만나서 직접 듣고 싶다고 합니다. 욥이 “깊은 곳에서” 부르짖는 이런 말들이 자기도 모르는 죄들을 드러내는 내용입니다. 마침내 욥기 38장 1절에서 3절, 40장 1절에서 2절에 하나님이 욥의 소원대로 그의 앞에 직접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지한 이치를 떠드는 자,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라는 하나님의 호출에 욥이 대답한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욥의 대답입니다. 욥기를 보면 욥기 3장부터 31장까지 욥은 자기의 억울함에 대해 할 말이 정말 많았었습니다. 이처럼 죄 짓고 “깊은 곳”에 있는 영혼들의 특징은 할 말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 경험, 억울함, 두려움, 분노, 슬픔, 놀라움, 등등등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처럼 말이 많으면 자기가 죄를 짓는지도 모르고 막말을 쏟아내고 있는 중입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더는 말하지 않겠다고 대답했을 때 욥은 비로소 자기의 절망적인 “깊은 곳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비로소 자기의 모든 죄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시편 130편의 시인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이 붙은 130편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부르는 찬양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평온하지 못하고 뭔가 답답하고, 짜증나고, 예배드리러 가기가 괴로운 겁니다. 그래서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부르짖는 소리를 제발 들어달라고 반복하며 소리쳤습니다. 욥과 같이 자기의 답답함을 풀어보려고 부르짖은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동안은 하나님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욥이 세친구들과 세 번씩 차례대로 8번의 주고받는 대화를 끝내고, 젊은 엘리후의 충고까지 다 듣고 나서 잠잠해 지자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더 할 말이 없다 하고 생각하고 잠잠해지면,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면 욥처럼 자기의 입을 가리고 잠잠히 있어야 합니다.
 
깊은 곳에서 부르짖던 시인이 더 이상 자기가 말할 타임이 아님을 깨닫는 시점이 3절입니다. 육체로 영으로 지은 모든 죄악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된 시점입니다. 깊은 곳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사유하심”은 용서로 번역됩니다. 주께서 내 죄를 다 용서해 주셨고, 그 용서의 이유는 “주를 경외하게 하시려고”였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경외”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잠언 19장 23절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생명에 이르고,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죄를 용서할 능력도 자격도 없는 존재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죄는 절망의 깊은 곳으로 우리를 끌어내립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의 늪에 빠졌을 때에 도움을 청할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절망의 깊은 곳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립시다. 할렐루야!!

2. 주를 경외하는 자가 바라고 기다리는 것 
사람마다 일생을 사는 동안 수많은 소원과 기다림을 품고 살아갑니다. 절망의 깊은 곳에서 건짐을 받은 시인은 고백을 합니다. 밤새도록 잠 못 자고 성을 지킨 병사가 동료가 나타나 교대해 줄 아침을 기다리는 간절함보다 더 간절히 하나님을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밤새고 일한 사람이 아침 퇴근 종이 울리는 시간을 기다리는 간절함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간절함이 내게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니 ‘그 정도로 간절하지는 않는데요’였습니다. 하나님께 죄송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기로 다짐을 한 우리가 가장 바라고 구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시인처럼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하나님을 기다리며 그분 말씀을 사모하고 계신지요?

세상 어떤 부귀영화와 금은보화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시는 여러분이기를 축복합니다. 그런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간절히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며,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친밀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절망의 깊은 곳에서 부르짖던 시인은 모든 죄가 다 용서되었음을 깨달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 뜻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자기 삶을 성찰하고 회개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허다한 죄를 다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더 순종하기 위해 애씁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더욱 경외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자가 되어 하늘의 신령한 것과 땅의 기름진 것으로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은총을 입게 됩니다.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되어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림보다 더 하나님을 바라고 말씀을 기다리는 복을 받으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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