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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주일 말씀

아름다운 고난을 본받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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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아름다운 고난인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음이 아름답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9절 ~ 25절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베드로전·후서는 베드로 사도가 초대교회들에게 보내는 공동서신서입니다. 공동서신이란, 한 개인이나, 지정된 한 교회를 위해 보낸 편지가 아니라 여러 교회가 회람하도록 보낸 편지를 말합니다. 네로 황제에 의해 곧 닥치게 될 혹독한 고난에 대비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소망으로 고난을 인내하고 극복하도록 권고하며 격려하려는 편지입니다. 로마의 대형경기장 부근에서 시작된 불은 삽시간에 도시를 집어삼켰습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인명 피해와 이재민이 생겼고, 원로들은 네로황제를 향해 정치적 공세를 퍼부었습니다. 네로는 자기에게 닥친 위험 국면을 전환할 목적으로 기독교인들이 로마에 불을 냈다는 가짜뉴스를 퍼뜨렸습니다. 그로 인해 로마의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들이 믿음을 잘 지키도록 사도 베드로는 위로와 권면의 글을 보냈습니다. 네로 치하의 성도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비난과 모욕과 박해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고난을 크게 기뻐할 정도로 귀한 믿음을 보여주었다고 7절이 말씀합니다. 성도들의 이 믿음을 베드로사도는 “불로 연단한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의 풀무를 지난 성도들이 순금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귀한 믿음, 굳센 믿음은 고난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고난이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은 자기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진짜 믿음이 되게 해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그런 진짜 믿음이 되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진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하며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 무엇이 아름다운 고난인가?
“아름다움”과 “고난” 마치 어울리지 않는, 어쩌면 어울릴 수 없는 단어가 아닐까요? 아름다움(Beauty, 美)은 하는 일이나 마음씨 따위가 훌륭하고 갸륵함입니다. 고난(Suffer, 苦難)은 괴로움과 어려움을 아울러 이르는 말입니다. 훌륭하고 갸륵함과 괴로움과 어려움. 평온함과 고통스러움이 동시에 존재하기 힘들듯이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 같습니다. 그런데 본문 19~20절은 두 번이나 계속해서 고난이 아름답다고 강조합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어느 누가 자기가 당하는 고난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나 고난당하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나에게 아픈 고통을 가하는 사람에게 불평과 원망을 쏟아놓는 것이 당연한 모습일 것입니다. 더구나 당시의 성도들은 네로 황제가 지어낸 거짓말 때문에 고난당했습니다. 이 부당한 고난을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는 것, 선을 행하는 것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때문에 부당한 불이익을 말없이 무조건 참아야 아름답다는 것일까요? 불의가 행해지는 것을 묵인하는 것,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러 성경책을 찾아봤습니다. 대부분의 한국어 성경은 “아름답다”로 번역이 되어 있었습니다. NIV 영어성경은 “Beauty” 대신에 “Commendable; 칭찬받을 만하다”를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헬라어 원어는 어떤 단어를 사용했는지도 찾아봤습니다. 헬라어 원문으로는 “투토 카리스; 이것이 은혜입니다”라는 문장이었습니다. 이 원문을 그대로 번역한 <우리말 성경>은 이렇게 번역되었습니다. 
19. 어떤 사람이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을 생각하며 슬픔을 참으면 이것은 은혜입니다. 
20. 여러분이 죄를 지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선을 행하다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은혜입니다.

 

최근에 번역된 우리말 성경이라 원문에 좀 더 충실하게 번역된 본문 같습니다.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참게 해주시니 은혜라는 말입니다. 내게 불의를 행하는 원수에게 복수하는 대신에 참는 마음을 주신 것이 은혜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주셨으니 어찌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즉, 자기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참으니 그 모습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 “투토 카리스; 이것이 은혜입니다”를 “이는 아름다우니라”로 번역한 한국어 번역가들의 영성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분들의 번역 덕분에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름다운 고난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2.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음이 아름답습니다. 
19~20절에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부당한 고난을 참는 것은 아름다운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부당한 고난을 당할 때 똑같은 부당함으로 맞서지 말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부당하게 공격하는 자에게 오히려 아름다운 고난을 당해주도록 우리를 부르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21절의 “이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아름다운 고난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따라가야 할 아름다운 고난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가야 하는 예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실 때 하신 말씀이 “너는 나를 따르라”였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제자들은 그대로 따라서 모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아름다운 고난에 대해 본문 22~24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22절은 예수님이 죄도 없고 거짓도 없으신 분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않으셨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셨으나(고난당하셨다)”입니다.하나님의 아들이이요,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죄가 없으심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대부분의 고난은 죄의 결과로 다가오는 징계이므로 예수님과 고난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고난 받기를 자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해 아름다운 고난을 자처하신 것입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당하는 고난이 생겼을 때 예수님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반드시 복수를 하고 말겠노라 다짐하는 것은 아름다운 고난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들으면서도 같이 욕하지 않으셨고, 침 뱉고, 머리와 뺨을 치는 사람들에게 같은 행위로 대적하려고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뜻에 온전히 복종함으로써 공의로 심판하실 하나님께 모든 수욕과 수치를 맡기신 예수님께서 받으신 아름다운 고난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이어서 24절에서 죄 없는 예수님은 스스로 저주의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자기 몸으로 담당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다시는 죄에게 끌려 다니며 죄의 종노릇 하지 않는 의인들이 되게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대신 채찍에 맞으심으로써 우리 몸의 질병들을 치료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부당한 고난을 물리칠 수 있는 하나님 아들의 능력을 가지고 계셨지만, 하나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묵묵히 아름다운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제 25절은 예수님의 아름다운 고난을 통해 맺어진 열매에 대해 말씀합니다. 전에는 우리 모두가 길을 잃은 양과 같이 세상에서 헤매던 죄인들이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고난을 입히면 복수의 칼을 갈면서, 같이 욕하고, 더 악랄한 고통을 주기 위한 방법을 고안해 내고, 평생토록 한을 품으며 살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이었습니다. 마치 겁 많고 힘없는 강아지일수록 더 사납게 짖으며 달려들고 물어뜯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우리의 영혼은 나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예수를 내 영혼의 목자와 감독으로 모셨습니다. 이제는 내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신 예수님께서 행하신 자취를 본받으며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고난의 은혜를 입은 그대로, 우리도 아름다운 고난의 은혜를 입으며 예수를 따라가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대로 본받음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은혜를 받는 아름다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네로 황제의 핍박이 거세어지는 시점에 초대교회는 커다란 시련 앞에 서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믿음과 소망을 굳건하게 세우고 다가올 고난을 잘 극복하도록 회람 형식의 편지를 교회들에게 보냈습니다.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더 선을 행하도록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아름다운 고난을 본받으라고 격려했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제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야 할 의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담당하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악한 사람들에게 당하는 부당한 고난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부당한 고난을 하나님의 은혜로 순종하심으로써 아름다운 고난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을 본받는 예수 제자로서 살고 있는지 깊이 생각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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