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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주일 말씀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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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자신에게 찾아온 억눌린 마음을 풀어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기도함으로 마음의 짐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 예배를 통하여 선포되는 말씀에서 응답 받으십시오.

 

열왕기상 19장 1절 ~ 8절
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오늘날 현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급박하고 다양한 일들과 각자의 형편 가운데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스트레스가 오랫동안 노출 되거나 과중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신이 파괴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성품이 거칠어지고 대인 관계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며 가정까지 영향을 미치게 됨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몸과 마음까지 병들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열왕기상 17장에서 19장에 보면 스트레스로 인해 깊은 우울증에 빠졌던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아합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아합 왕과 그의 아내 이세벨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이방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이스라엘에 들여왔습니다. 이방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온 백성에게 우상숭배 하게 함으로 모든 백성을 죄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엘리야의 기도로 그 땅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온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참신인지 바알이 참신인지 가리기 위한 대결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각각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송아지를 각을 떠서 올려놓고 하늘에서 불로 응답하는 신을 참신으로 모시기로 하였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먼저 바알에게 불로 응답하기를 온종일 기도 했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 선지자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송아지를 각을 떠서 올려 논 제단에 즉시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그 결과 온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참신으로 모시기로 하고 엘리야는 기손 시냇가에서 바알의 선지자를 모두 죽인 위대한 선지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긴장이 풀리기도 전에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로부터 다음과 같은 협박 전갈을 받습니다. “내일 이맘때에 네가 죽인 선지자 450명처럼 너도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는 협박을 받게 됩니다.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 상대로 싸워 이긴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이 전갈로 인해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는 결국 우울증과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고 유대 땅 브엘세바로 피신을 합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엘리야 선지자는 자신의 사환을 남겨두고 하룻길을 더 걸어 광야로 들어갑니다.광야로 들어간 엘리야는 로뎀나무 밑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지친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하나님 이제 충분하오니 내 생명을 거두소서. 나는 나의 조상들보다 훌륭하지 못 하나이다.” 엘리야 같은 훌륭한 선지자도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니 우울증에 걸려 좌절하고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사회생활뿐 아니라 가정생활과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각자 크고 작은 스트레스에 항상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를 괴롭히는 스트레스를 슬기롭게 극복하여 건강하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말씀을 통해 깨우치는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우리는 자신에게 찾아온 억눌린 마음을 풀어놓아야 합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어떤 일에 휘말리게 되었을 때, 그 짐을 혼자 짊어지고 스스로 풀어 보려고 애를 쓰곤 합니다.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으면 점점 더 스트레스만 과중됩니다. 그럴 때에는 누군가에게 풀어놓아야 하는데 아무에게나 풀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짐들을 풀어놓았을 때 우리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지 않고 사랑과 이해로 받아줄 수 있는 사람에게 풀어놓아야 합니다. 좋은 상담자를 만나 상담을 통해 마음을 털어놓으면 쉽게 받았던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변에 가까운 친구, 평소에 신뢰가 쌓인 친구가 있다면 그런 친구를 상담자로 선택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신뢰할 수 있는 좋은 친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마음속의 스트레스를 친구에게 다 풀어놓으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상쾌해집니다. 여러분들도 살면서 평소 존경하는 선배나 스승을 찾아가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을 풀어놓은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특히 성도들은 주의 종에게 마음의 스트레스를 풀어놓습니다.대부분 자신의 마음을 하소연하러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들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물론 듣고만 있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습니다. 사실 말을 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훨씬 힘든 게 사실입니다. 상대의 고민, 하소연 등을 30분 또는 한 시간 이상 계속 듣다 보면, 나중에는 듣는 내가 오히려 스트레스에 빠지는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상담을 와서 일단 자기 마음에 있는 짐을 다 풀어놓은 사람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고 상쾌해져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갑니다.

여러분에게 혹시 고민 상담을 하러 오는 친구나 지인이 있다면 여러분들도 어떤 대안을 제시해 주려고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들어주는 것 자체가 상대에게 위안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잠언 17장 22절에서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즐거우면 신체까지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이 상하면 신체도 병이 드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병을 가져다주는 것이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결국 스트레스를 계속 짊어지고 있으면 신체까지 망가지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을 때 사랑하는 친구나 선배 그리고 스승이나 주의 종에게 그때그때 털어놓으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상쾌해져서 긍정적인 사고를 가질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마음은 몸에 여러 가지 나쁜 호르몬을 생산하게 하고 그로 인해 심신이 파괴됩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마음의 짐들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므로 가벼운 마음과 긍정적 사고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신뢰를 하는 친구지만 또는 스승이지만 주의 종이지만 정말 털어놓고 싶지 않은 것들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문제에 봉착되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2. 하나님에게 기도함으로 마음의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위대한 엘리야 선지자도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하여 4절에서 처럼 하나님 앞에 하소연을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수제자라고 자부한 베드로는 어떠했나요? 유다의 배반으로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사람들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찾아와 예수님을 잡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끌고 갑니다.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 부인하며 저주까지 합니다. 그때 닭이 울었습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자신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몹시 울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스스로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자부하던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했다는 죄책감은 그를 견딜 수 없는 절망감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날마다 베드로는 괴로워 몸부림치며 울다가 거의 폐인이 되어 주님이 주신 사명조차 던져 버리고 고향의 바닷가로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져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어느 날 새벽에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얘들아 거기에 무엇이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 보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순간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도 요한은 “예수님이시다”라고 소리를 칩니다.

그 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조금만 더 노를 저으면 바닷가에 도착할 수 있는데 너무나 기쁜 나머지 예수님께 가려고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그러나 베드로는 반가운 마음과는 달리 도저히 예수님을 뵐 면목이 없었던 그는 벌벌 떨면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제자들의 형편과 사정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불을 피우고 떡과 고기를 구워 제자들과 식사할 준비를 해 놓고 계셨습니다. 식사가 끝난 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즉, ‘목숨을 바쳐 나를 사랑하느냐”는 “아가페” 사랑을 물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는 ‘친구로서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즉 ‘필레오’적 사랑을 고백한 것입니다. 잠시 후 예수님은 또 물으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역시 ‘아가페’의 사랑으로 “네가 전에 목숨을 바쳐서 감옥에도 같이 가고 죽는데도 같이 간다고 말했는데, 그러한 사랑으로 지금도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의미로 물으신 것입니다. 이 두 번째 질문에도 베드로는 “주여, 나는 주님을 그저 친구로 사랑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잠시 후 세 번째로 주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진짜로 나를 친구로 사랑하느냐?” 그 말에 베드로는 그만 대답할 용기를 잃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되 죽곳이라도 같이 가겠다고 해놓고 세 번씩이나 주님을 배반한 일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친구로 사랑한다고 대답했더니 주님께서 “정말 나를 친구로라도 사랑하느냐?”라고 되물으시니 베드로는 그 사랑마저도 할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 저는 모르겠습니다. 주님이 아시지요 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완전하게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 놓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했을 때 주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나도 안다. 너의 힘으로 안 된다. 하지만 내가 너를 도와줄 터이니 너는 그저 나만 믿고 따라오기만 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그제야 깊은 수렁에서 벗어남을 느끼고 완전히 스트레스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짐을 짊어지려고 할 때, 우리는 그 스트레스를 견뎌 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을 따라가면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 앞에 나와서 자신의 못나고 연약한 것들을 다 고하고 자아가 깨져야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철저히 자아가 깨어져 주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고 겸비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고 또 찾아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을 간절히 찾고 또 찾을 때, 주님은 우리를 거둬 주시면서 “오냐 나만 믿고 따라오너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을 쉬지 말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아가 깨어져 주님 앞에 마음을 다 풀어놓고 주님을 앙망하며 기다리면 주의 능력과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를 스트레스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자신을 앙망하는 자에게 놀라운 새 힘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사화복을 모두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그리고 지금 지고 있는 모든 짐도 주께 다 내려놓고 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지각과 평안을 주시는 주님께 우리의 모든 짐을 맡기고, 주님만을 의지하고, 앙망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예배를 통하여 선포되는 말씀에서 응답받으십시오.
신뢰로 만나는 친구, 덕망 있는 스승, 또는 주의 종에게 조차 털어놓기 힘든 일들을 주님께 기도로 나아갔는데 속히 응답이 임하지 않아 해결이 안 될 경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배를 통하여 선포되는 말씀에서 응답 받으십시오. 비누는 쓸수록 물에 녹아 없어지는 물건이지만 우리의 더러운 때를 씻어줍니다. 물에 녹지 않는 비누는 결코 좋은 비누라 할 수 없습니다. 사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마음이 없고 몸만 사리는 사람은 물에 녹지 않는 비누와 같은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은 신학적으로 ‘케노시스’의 본문이라고 합니다. 케노시스는 예수님이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셨다는 뜻입니다. 삼위일체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케노시스 사건을 통해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처럼 희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비누 대신 돌덩이가 되어 녹지 않으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우지 않고 채우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마음속에 모든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 살려고 해도 그것이 결국 작심삼일로 끝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마음을 비우기는 했지만, 그 안에 다른 어떤 것을 채우지 않았기 때문에 깨져버리는 것입니다. 비어낸 마음에 예수님을 모셔드리면 큰 은혜와 능력이 임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채우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으로 채워서 비어있는 우리의 마음에 사단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를 얻던 못 얻던 선포되는 말씀에서 응답받고 또 말씀으로 비워진 마음을 채워 늘 무장을 해야 사단의 공격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그 심령에 있는 스트레스를 모두 제거하시고 마음에 넘치는 평안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긍정적으로 변하게 되고 성경 말씀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긍정적으로 변함에 따라 온몸에 면역력이 높아지고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강해져 건강한 삶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본능적으로 70에서 80% 정도까지 부정적인 생각과 두려움으로 차 있다고 합니다. 이런 두려움과 부정적인 사고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교회에 와서 예배를 통하여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마음속의 부정적인 생각을 말씀과 성령으로 몰아낸 후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사고로 채워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총을 베푸셔서 우리를 스트레스에서 해방시키시고 평안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예배를 사모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 가운데 긍정적이며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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