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주일 말씀

보이지 않을지라도 항상 계시는 하나님

반응형

욥기 23장 8절 ~ 10절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히 무궁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오래 참으시며 기다리시는 하나님입니다. 비록 죄짓고 불의했을지라도 회개하는 심령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창조 이후로 우리에게 항상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의 박수를 올려 드리며 생명의 말씀 듣기를 원합니다. 할렐루야!!

욥기 23장은 엘리바스의 변론에 대한 욥의 세 번째 답변입니다. 앞장인 욥기 22장에서 엘리바스는 세 번째 변론을 했는데, 앞에서의 변론들에 비해 내용이나 어조가 더 극단적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당한 환난이 욥의 죄 때문이라고 직격탄을 날립니다. 욥을 '죄인'이라고 지칭하며 정죄하고 그의 죄를 일일이 나열하며 비난했습니다. 악인들은 필히 멸망한다고 가르치며 욥이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목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이제 욥은 더 이상 친구들과 변론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 없다고 결론 내린 듯 23장 1~2절에서 독백의 말로 대답을 시작합니다.   

욥의 반항과 근심은 하나님을 향한 불만과 친구들을 향한 불만이 섞여 있는 듯합니다. 세 명의 친구들은 돌아가면서 욥이 고난에서 빨리 벗어날 방도에 대해 가르치려 했습니다. 욥은 친구들의 가르침이 자기를 점점 더 괴롭게 하는 언어폭력이라고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욥이 당한 재앙은 욥의 범죄에 대한 인과응보의 형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과의 변론은 욥에게 점점 반항심을 불러오고, 심적 고통만 커지게 했습니다. 욥은 이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만 대화하고 싶을 뿐입니다.

 

고통이 너무 크면, 사람에게서 위로받을 수 없음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거친 폭풍우 가운데 홀로 서 있다는 깊은 고립감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친구들의 해결책을 들으면 들을수록 욥에게 드는 생각이 바로 그와 같았습니다. 욥은 마침내 친구들이 듣고 좀 깨달아야 한다는 식으로 하나님께 이렇게 외칩니다.  
 
‘내 호소를 들어주시고, 내가 죄 없이 당하는 이 고난이 억울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실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외침입니다. 하나님은 친구들처럼 욥과 다투려고 덤벼들지 않으실 것이라는 외침입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면, 욥의 탄식도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는 독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날 수 없으니 욥이 너무 괴롭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 분입니다. 환란 당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고난 위에 고난으로 탄식하며 찾는데도 욥을 만나 주시지 않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지금, 욥은 상처투성입니다. 사탄의 공격으로 모든 재산과 , 자녀들을 잃었고, 온몸에는 종기의 상처로 뒤덮였습니다. 위로자로 찾아왔던 친구들의 공격에 마음과 영혼까지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탄식하던 욥이었습니다. 욥의 탄식을 들은 친구들은 욥의 영적 상태를 근심하며 회복을 위한 권면을 시작했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라고 충고하는 친구들과의 말씨름 때문에 더 지치고 고통스러운 처지가 되어버린 욥입니다. 그러자 이제 하나님을 만나서 자기 속 사정을 토로해야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욥을 공감해주지 않는 친구들을 외면하고 하나님과만 대화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상황의 욥을 만나 주지 않으셨습니다. 욥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욥이 하나님과 만날 시점이 아니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욥의 영혼이 크게 흔들렸고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는 상태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자기가 죄인임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임재를 두려워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이 느낀 감정이 거룩한 분 앞에서의 두려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천상 회의에서 하나님을 뵈옵고 드린 고백도 그랬습니다. 

이런 영적 단계에 이르러야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건만 욥의 심령은 고통에 매여있습니다. 자기 자신은 죄가 전혀 없으며, 하나님이 의로운 자기에게 불의하게 행하셨노라고 주장하는 욥이 어떻게 하나님을 뵈올 수가 있겠습니까? 욥은 극심한 고난이라는 자기 상처만 보느라고 하나님을 보는 영적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욥 자신은 그 사실을 몰랐지만, 친구들은 욥의 영적 상태가 흔들렸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4장부터 시작된 대화들에서 욥의 친구들은 욥이 악인이라는 것을 빙 돌려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22장에서 엘리바스는 더 이상 그런 배려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욥이 약한 자들의 재물을 빼앗고 학대한 파렴치한 악인이라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그는 욥의 진심 어린 탄식을 범죄자의 교만한 말솜씨라고 치부했습니다. 그리고는 결론적으로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즉, “욥아, 네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겸손히 회개하라는 권면을 받아들이고 죄에서 구원받아라” 말한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숨은 교만을 지적하는 엘리바스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억울함을 친구들이 믿게 해 주셔야 한다고 요구한 것입니다. 욥과 친구들은 서로서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말하고, 보고, 듣는 사이였습니다. 

이것이 욥이 하나님을 찾아도 만날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투철한 ‘자기 의인 의식’ 은 항상 곁에 계신 하나님을 보는 영적 눈을 감게 만듭니다. 그렇게 영적 장님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욥은 욥기에서 가장 감동적인 말을 10절에서 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비록 욥이 하나님을 만나지는 못하고 있지만, 욥이 뚜렷하게 알고 있는 것들을 고백한 것입니다. 첫째로, 자기가 가는 길을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고백입니다. 즉, 자기가 행한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안다는 것입니다. 욥이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둘째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단련하시고 계신다는 고백입니다. 즉, 지금의 모든 고난은 과정이지 결론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 고통은 끝이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받게 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셋째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순금과 같이 정결하게 만드시고 계시는 것을 안다는 고백입니다. 불순물이 많이 섞인 금속이 뜨거운 제련과정을 거쳐 순금으로 탄생되듯이 말입니다. 실제로 땅속에 파묻혀 있는 금광석에는 금보다 불순물이 훨씬 더 많이 섞여 있습니다. 그 금광석을 용광로에 넣고 1000도 정도의 열을 가하여 녹여야 금이 분리됩니다. 금광석이 녹아서 불순물들이 물처럼 떠오르면 위에 있는 물을 쏟아내고 맨 아래에 가라앉은 금을 얻게 됩니다. 금을 품은 돌을 뜨거운 불로 녹여 금을 얻듯이 사람의 신앙도 마찬가지의 단련을 받아야 합니다. 육체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풀무 불 속에서 단련하고 또 단련해야 점점 순금 같은 신앙인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실상, 욥은 뛰어난 의인이라고 자타가 인정하고 하나님께서도 인정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기 안에 많은 불순물이 섞여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상태를 모르기 때문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자기주장’과 ‘자기 의인 의식’이 점점 더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 불순물이 섞인 상태로 하나님을 찾고 또 찾으니 만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거룩함과 화평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라고 히브리서 12장 14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불평하고, 친구들을 무시하는 모습으로 어찌 하나님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이전에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욥이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결국 욥은 욥기의 결말에서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과 다투는 자, 트집 잡는 자, 하나님을 탓하는 자”인 줄을 몰랐습니다. 자기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는 ‘자기 확신’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들이 자기에게 권면하는 변론들이 가소롭고 아니꼬왔던 것입니다. 그런 욥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하나님께 트집을 잡고, 하나님과 다투고, 탓하는 자”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던 욥이 왜 그렇게 변했을까요? 그가 입으로는 하나님 뵙고 싶다고 말했지만, 자신의 고통만을 보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다윗은 천국에서도, 지옥에서도 하나님은 자기와 함께 계시고, 새벽의 바다 끝에서도 자기를 만나 주실 것을 시편 139편 8절부터 10절까지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라고 자신을 경계함으로써 자기를 신뢰하지 않도록 깨어있었기에 이런 고백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3장의 욥은 아직 다윗의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신앙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에나 계시는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 승천하시면서,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라고 약속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와 늘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늘 함께 계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전혀 만나지 못하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욥은 이 두 가지 상황을 다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가 자기의 상황을 사람들에게 장황하게 하소연할 때는 하나님을 찾아도 뵐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사람들 앞에서 잠잠해지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셨고, 말씀하셨습니다. 찾아오신 하나님 앞에서 비로소 욥은 자기가 순금이 되기 위해 단련되어야 할 영혼임을 깨닫고 자기의 입술을 가렸습니다.

순금처럼 정결하게 단련된 사람은 하나님이 항상 자기와 함께 계신 것을 체험합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입을 닫고, 듣는 귀를 여는 사람이 됩니다. 다윗과 같이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라고 명령하며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보게 됩니다.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항상 계심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함께 계시는 하나님> 품에 항상 안식하며 순금과 같은 신앙으로 살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