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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주일 말씀

거듭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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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논쟁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듭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욥기 33장 12절 ~ 18절
12.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그대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13.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  
14.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  
15.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에 환상을 볼 때에  
16. 그가 사람의 귀를 여시고 경고로써 두렵게 하시니  
17.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18. 그는 사람의 혼을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을 칼에 맞아 멸망하지 않게 하시느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자기의 자녀를 책임집니다. 그러나 이웃집 아저씨는 자녀가 아니므로 책임을 지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영원히 책임져 주실 힘과 능력이 무궁무진하신 아버지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우리는 정말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멘

곁에 있는 지체들을 이렇게 축복하십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당신은 정말 복 있는 사람입니다.” 좋으신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립시다.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는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우리는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조금도 의심 없이 믿고 찬양하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평안할 때는 찬양하다가 곤고해지면 원망 불평하는 그런 자녀가 되면 안 됩니다. 다윗처럼 밤이나 낮이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주 날개 그늘 아래 있음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시편 42편 1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 자녀인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뿐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기를 원했던 욥의 모습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들으며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과 논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욥기 3장부터 31장까지 욥과 친구들의 대화를 잠잠히 듣던 엘리후는 네 사람에게 분노를 느꼈습니다. 32장에서 시작된 엘리후의 말은 37장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본문 33장에서는 엘리후가 그동안 주의 깊게 들었던 욥의 말을 예를 들면서 반박합니다. 욥은 자기가 하나님보다도 의롭다고 주장했고, 친구들은 무작정 욥을 정죄했습니다. 모두가 잠잠해지자 가장 연소한 엘리후가 하나님보다 더 의롭다고 주장하는 욥의 말이 불의하다고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신 하나님께 이런 말이 합당한 지를 욥에게 질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이 말씀에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모든 불평과 이의(異義)를 잠잠하게 할 만한 충분한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이요, 사람과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에게서 사람에게나 있는 잘못을 찾는 행위는 어리석고 부당한 것입니다. 그리므로 욥에게 하나님과 논쟁하지 말라고 13절에서 엘리후가 말합니다. 

약하고 어리석고 죄 많은 사람이 무한히 지혜롭고 선하신 하나님과 논쟁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가 감히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권세에 맞서서 논쟁할 수 있겠는지요? 사실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잔혹하게 대적하시고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신다고 불평했었습니다. 욥이 이런 말들을 할 때 엘리후는 곁에서 직접 듣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하나님께 그런 말을 하는 게 올바른 것인지 생각해 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위기에 처할지라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말을 금지해야 한다는 교훈을 욥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욥이 한 말들은 사실상 기막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탄식이었지만, 그런 말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이런 불신의 말들이 하나님과 논쟁하는 말이 된다는 것을 지혜자인 욥도 몰랐던 것입니다. 욥 같이 지혜로운 사람도 그럴진대 우리와 같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지요? 우리가 하는 말은 사람만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신다는 것을 깊이 기억하시고  일절 부정적인 말들을 입술에서 금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불평불만, 탄식과 저주 등 하나님을 불신하는 말은 하나님과 논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2. 거듭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엘리후가 친구들과 다른 점은 욥의 성품과 삶에 대해서 트집을 잡지 않았습니다. 다만, 욥에게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억울함을 변론해 주시지 않는다는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해 준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의 부당한 고난을 변론하느라고 하나님 음성을 들을 수 없었음을 깨닫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계속 말씀하셨는데 욥이 자기주장만 늘어놓느라고 안 들었다는 것입니다.

 

욥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대부분 자기에게 필요한 말씀만 듣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예수님 말씀에 관심 두지 않았던 것을 성경이 증거합니다. 답답하신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아직도 깨달음이 없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라고 물으실 정도로 주의를 기울여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버림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세 번 말씀하셨어도 열두 제자 중에 아무도 깨닫지 못한 이유도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듭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주의를 기울여 듣지 않습니다.

이어서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사람에게 거듭 말씀하시는지 15~16절에서 구체적인 예를 들었습니다. 침대에서 졸 때, 깊이 잠들었을 때, 꿈속에서, 환상 중에, 등등 사람의 귀를 여시고 경고하심으로써 마음에 두려움을 느끼도록 거듭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오늘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의미는 ‘자기 죄를 깨닫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으니 나는 죽었구나’라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리라”는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말씀에 관심을 두고 자기를 살펴 회개하는 영혼,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영혼에게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살리기 위해 두려움이 생기는 말씀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께 회개하고 죄악에서 돌아서게 하십니다. 엘리후가 이어서 17~18절에서 하는 말도 같은 내용입니다.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17절하)” 욥이 교만하다고 평가한 것입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도 욥에게 교만하다고 말했었습니다. 엘리바스의 말에 대해 욥이 무참히 무시하며 반박했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뿐만 아니라 욥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도 40장 8~10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욥이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악하다고 말하고, 하나님처럼 능력 있고, 위엄과 존귀로 단장한 영광과 영화를 입은 자처럼 말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상 욥은 3장의 첫마디부터 하나님을 거부하는 말로 시작해서 31장 마지막 절까지 자기가 얼마나 의롭게 살아왔는지만을 계속 주장했었습니다. 

 

그러면 3장 1절과 31장 35절을 보시겠습니다. 
3장 1절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31장 35절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고, 자기 죄를 고소하려면 하나님께 고소장을 보내라고 말한 욥입니다. 사람에게서 하나님 면전의식(面前意識)인 <코람 데오>가 사라질 때 이런 교만한 말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오죽 더하겠느냐는 생각, 다시 한번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정말 무궁해서 진멸당해야 마땅한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무한정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욥기에서 보입니다. 결국 38장과 40장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여 말씀을 듣고 난 욥은 진심으로 회개합니다.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코람 데오, In front of God>, 하나님 앞에서의 모습으로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하듯이 말하고,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듯이 행동하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동안 그렇지 못했던 모든 악한 말과 행실을 깨닫고 이제는 회개할 수 있게 된 욥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 말씀에 깊은 관심을 둔 사람의 모습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욥은 누가 봐도 형통하고 경건한 의인이었습니다. 욥의 고난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다 거두시면 욥이 하나님을 배반할 거라는 사탄의 참소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탄과의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사탄에게 욥을 괴롭히도록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욥의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욥이 경건의 모양은 남아 있지만, 경건의 능력에 문제가 생겼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런 모습으로는 이 땅에서 칭찬받고 잘 살 수 있을지언정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꿈으로, 환상으로, 깊은 잠에서, 깜박 졸 때에 자신의 상태를 깨닫도록 거듭 말씀하셨지만 욥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 머물다가 보니 당한 자기의 고난이 너무 기가 막혔고, 억울하기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주변 사람에 대한 섭섭함과 무정함만 점점 더 깊어져 더욱 외로워졌습니다. 

만약에 욥이 멀리서 위로하러 찾아온 친구들의 야멸찬 정죄를 겸손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그가 뼛 속까지 의인이라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증명됐을 것입니다. 친구들이 정죄하는 말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다고 인정할 수 있었다면 말입니다. 그랬다면 ‘욥의 고난의 기간이 훨씬 더 짧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여러 경로로 우리에게 거듭 말씀하셔서 경고를 받고 두려워하여 회개하게 하십니다. 그 여러 경로는 우리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을 통로로 사용하실 때가 많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거듭되는 경고의 말씀에 깊은 관심을 둘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고, 생명을 풍성하게 얻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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