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주일 말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가치

반응형

▣ 상한 마음을 치유해야 함

▣ 악을 선으로 갚으며 살자

▣ 죄에서 돌아서는 삶

 

마태복음 5장 13절 ~ 16절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여러모로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아갑니다. 살아가면서 마음먹은 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 초조하고 불안함을 느껴 염려하며 근심하게 됩니다. 근심과 걱정을 떨쳐내기 위해 우리는 가치관이 그리고 정체성이 뚜렷해야 합니다. 가치는 보이지 않지만, 그 사람의 본질이며 내면세계를 표현합니다. 또한 가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가치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또한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살 때, 무엇인가 판단을 내려야 할 때, 사람들은 가치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그래서 가치가 건강한 사람은 건강한 삶을 살고, 가치가 빈약한 사람은 빈약한 삶을 삽니다. 인생은 속도보다는 바른 가치를 가지고 사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 하나님의 말씀 중에 어떤 계명이 가장 가치 있는 말씀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가치 있는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리는 단순합니다. 예수님은 아주 명쾌하게 인간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방향성입니다. 오늘 우리는 삶 가운데 어떠한 방향성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지 알아가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상한 마음을 치유해야 함
본문 13절의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을 합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 데가 없어지듯이 우리의 가치 기준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이 방향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는 조물주이신 하나님 진리의 말씀인, 대신 계명과 대인 계명이 우리의 가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자기의 뜻대로 살려고 하자,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의 왕좌를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왜 사울은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요?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후, 전쟁을 끝내고 돌아 왔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부르는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노래를 듣고 사울은 마음속에서 큰 열등감이 올라왔습니다. 자신과 다윗을 비교하면서 열등감으로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다윗은 목동 출신의 소년이었지만 사울은 왕이었습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다윗은 자신과 비교할 대상이 못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마음속에 있는 열등감이 사울을 불행의 길로 이끌어 간 것입니다. 자신의 왕의 자리를 다윗이 빼앗아 갈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그 이후로 사울은 국가의 중대사를 다 뒤로하고 다윗을 죽이려는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비교를 통한 열등감으로 상한 마음에 포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울의 마음속에 있는 열등감이 치유되지 않아 괴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명품이고 하나님의 최고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울 왕은 결국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사했습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였습니다. 그토록 다윗을 죽이려 했던 사울 왕이었지만, 그가 전쟁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슬퍼하였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사울을 용서하며, 사울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었을까요? 다윗은 사울이 열등감과 두려움의 포로가 되어 살아간 불쌍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만일 자식을 잃은 부모의 상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교회로 데려왔을 때에 만일 교회가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종교적인 교리만 강요하려 하거나 표면적인 감정의 위로만 하려 한다면, 교회도 세상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위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함께 울어주고 함께 슬퍼하는 가운데 생명의 주관 자 되신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뿐입니다. 그 어머니의 마음을 공감하며 진심으로 슬퍼하고,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기대하도록 돕고 중보 하는 것이 우리의 최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 길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하고 계심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우리에게 반드시 올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치유되지 않은 상한 마음을 치유받고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으로 용서하고 결국 승리의 삶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악을 선으로 갚으며 살자
유토피아(Utopia)를 쓴 토머스 모어(Thomas More)가 교수형을 당할 때의 일입니다. 사형 집행관이 마지막으로 소원을 말하라고 합니다. 이때 그는 유명한 말을 합니다. "성경에 보면 스데반이 죽을 때에 사도 바울은 이를 합당히 여기고 죽이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이 스데반을 죽였지요. 그런데도 스데반은 끝까지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이는 자를 위하여 기도를 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용서를 구했습니다. 마침내 그 사울이 변해서 바울이 되었고 그도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하늘나라에서 만나 같은 순교자끼리 친구가 되고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것을 믿습니다. 


오늘 내가 당신들의 손에 죽고 있지만 언젠가 당신들도 회개하여 주님 앞에서 친구로 만나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을 믿고 기도합니다." 토머스 모어는 엄청난 소원을 말한 것입니다. 그는 이겼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을 많이 비난했습니다. 어지간히 마음을 상하게 했지만, 그는 당당히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14절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회로부터 비난을 받지만 조금도 낙심하지 않고 앞을 내다보면서 이렇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이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죽더라도 상대방을 위하여 기도하고 복을 비는 것입니다. 악을 죽이는 것 아닙니다. 악을 제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악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이기는 것입니다. 목적도 선하고 방법도 선해야 합니다. 


어떤 영국 신사가 미국에서 가든파티를 열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가득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즐기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에 아메리칸 인디언 추장이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몹시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문간에 서서 주인을 불렀습니다. "배가 고프니 빵을 좀 주세요." 그러나 주인은 거절합니다. "당신 같은 야만인에게 줄 빵은 없어!" "그러면 목이 마른 데 물이라도 좀 주세요." "너 같은 놈한테 줄 물이 어디 있느냐" 영국 신사는 추장을 몹시 모독했습니다. 추장은 섭섭한 마음으로 돌아섰습니다. 그 뒤 어느 날, 그 영국 신사가 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목이 마르고 지친 채 산을 헤매다가 그만 기진해버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인디언 추장이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자기 집으로 데려 옵니다. 물을 먹이고 음식을 주어서 살려놓았습니다. "자, 당신 나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소" 영국 신사가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당신은 나에게 물도 음식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죽을 지경에서 살렸습니다. 마침내 나는 원수를 갚았소." 인디언 추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원수를 갚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여기에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저주하지 말라, 복을 빌어라,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라.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사랑으로 증오를 갚으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우리는 흔히 역사상에서 3대 악처를 꼽습니다. 욥의 아내, 소크라테스의 아내, 요한 웨슬리의 아내입니다. 욥의 아내는 욥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그를 저주하며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아내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 아내 때문에 철학자가 됩니다. 요한 웨슬리 또한 그 아내 때문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삽니다. 그래서 큰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악을 선으로 갚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갑니까? 고개를 들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십시오. 가장 무서운 힘은 진리의 힘이요, 가장 강한 힘은 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최대의 승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주님이 함께 하시고, 주님이 위로하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함께 하시고, 세상 끝날까지 바로 그 사람 편에서 그를 도우실 것입니다. 

 

사울 왕이 블레셋과 전쟁에서 전사한 이후로 아무도 블레셋 손에서 사울의 시신을 거둬 장례를 치르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담대하게 블레셋에 가서 사울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른 것입니다. 사울의 장례를 치른 사람들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라는 것은 알고 다윗은 전령을 그들에게 보내 은혜를 베풀어 사울의 장례를 치렀으니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것이라고 축복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그렇게 따라다닌 사울 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슬퍼하고 사울 왕을 위하여 장례를 치렀던 사람들을 축복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이 다윗의 위대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만약 다윗이 속이 좁은 사람이었다면 사울이 죽었을 때 기뻐했을 것이고 사울의 장례를 치룬 사람들을 징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악에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긴 사람입니다. 자신을 괴롭힌 사람을 용서하고 오히려 긍휼히 여긴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악을 선으로 이기며 어떠한 고난과 시험이 다가와도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죄에서 돌아서는 삶
하나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힘으로 사울을 쓰러트릴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믿고 묵묵히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만약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사울을 같이 죽이려 했다면 다윗도 사울과 똑같이 후대에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 반이 넘는 양의 찬양 시를 남길 만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굳건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위기가 다가오면 정직함을 잃고 인간의 꾀를 의지하며 임기응변으로 벗어나려고 하지만 결국 그러한 잔 꾀가 더 큰 어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느 날 목사님에게 두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한 여인은 자기는 큰 죄를 저지른 죄인이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또 한 여인은 자기는 일생 이렇다 할 큰 죄는 짓지는 않았지만 자질구레한 잘못은 많다고 했습니다. 목사는 두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큰 죄를 지었다는 여인에게 “당신은 당신이 들 수 있는 가장 큰 돌덩이를 가져오시오”라고 했습니다. 다른 한 여인, 자질구레한 잘못을 많이 했지만 일생 동안 이렇다 할 큰 죄를 지은 기억이 없다는 여인에게는 “자디잔 돌멩이를 치마폭에 가득 담아 오시오”라고 했습니다.
한참 후에 두 여인은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여, 한 여인은 커다란 바윗돌을 낑낑거리며 옮겨 왔고, 다른 한 여인은 새알만 한 잔 돌들을 치마폭에 가득 주워왔습니다.


그러나 목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안 하지만 이번에는 그 돌멩이들을 제자리에 갔다 놓으시오.” 큰 바윗돌을 가져온 여인은 다시 낑낑 거리며 바윗돌을 제 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어디서 가져 왔는지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알만한 잔 돌들을 치마폭에 가득 주어온 여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목사는 일생 동안 별로 큰 죄를 짓지 않고 자질구레한 잘못만 저질렀다는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하루하루 이러저러한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께 죄책감 없이 일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많은 죄를 짓고도 회개 한번 하지 않았소. 그러나 이 여인은 큰 죄를 짓고 이렇게 통회하고 자복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총이 함께하실 것이요.”라고 말하며 큰 죄를 지은 여자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우리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여 분노하며 죄를 지을 때가 많습니다. 특히 운전할 때 자기 차 앞으로 끼어드는 꼴을 못 보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경적을 울리면서 화가 나서 소리치지는 않습니까? 그러고 나서 잠시 후에 그는 그 운전사의 무례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 너무도 성급히 화를 낸 자신으로 인해 실망하여 머리를 흔들며 후회한 적은 없는지요?  더욱이 차에 십자가 목걸이가 걸려 있던지 물고기 스티커가 붙어있다면 아무도 그러한 부착물을 보지 않았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저나 여러분은 성령께서 “현우야 그만 해라. 너는 지금 나를 닮은 삶을 산다고 하면서 정 반대의 행동을 한 것 같다. 그렇지 않니?”라는 음성을 들기를 원합니다. 


음성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내가 자제하는 면에서 또 실패하였구나.'라고 하며 하나님께 혈기 부린 것을 자백하고, 아무리 작은 죄라도 자기의 죄를 용서를 구하며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중요한 가치를 지키며 살아가기 위해 우리의 상한 마음을 치유하고, 악을 선으로 갚고, 죄에서 돌아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일은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이지만. 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즉시 모든 것을 바로 회개 하는 것은 큰 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이처럼 작은 죄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작은 경험을 통하여 큰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 분노가 나의 육의 일부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그와 같은 감정 폭발에서 지켜주실 것을 그때그때 회개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이 정도쯤은 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많은 관계 가운데 서로 신의를 저버리고 불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들 주변에는 네 종류의 친구가 있습니다.
첫째는 (꽃과 같은 친구)
즉, 꽃이 피고 예쁠 때는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아끼지 않지만, 꽃이 지고 나면 과감하게 버리듯 자기 좋을 때만 찾아오는 친구를 말합니다.
둘째는 (저울과 같은 친구)
저울추가 무게에 따라 이쪽저쪽으로 가듯이, 자신에게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져 이익이 큰 쪽으로 움직이는 친구를 말합니다.
셋째는 (산과 같은 친구)
산처럼 온갖 새와 짐승들의 안식처이며, 멀리서 보거나 가까이 가거나 늘 그 자리에서 반겨주고, 생각만 해도 편안하고, 마음이 든든한 친구가 바로 산 같은 친구입니다.
넷째는 (땅과 같은 친구)
땅이 생명의 싹을 틔워주고 곡식을 길러내며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기쁜 마음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듯,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지해 주고 격려해 주는 친구를 말합니다.

 

여러분의 주변에 많은 친구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 깊이가 중요할 뿐 입니다. 우리 모두 인생을 살아가면서 상한 마음을 치료하고, 악을 선으로 갚으며, 죄에서 돌아서서 진정한 가치의 삶이 무엇인지 알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